현수막 3천장· 벽화 2백곳· 대형 걸개그림 선뵈

부안항쟁을 겪으면서 지역의 도시 미관도 큰 변모를 겪었다. 특히 반핵 선전활동의 하나였던 벽화는 시골의 작은 도시를 ‘그래피트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벽화나 걸개그림, 바닥그림 등을 그려 주민들에게 반핵을 알리는 데 앞장서온 이들이 바로 ‘막칠하세팀(막칠팀)’이다.
부안항쟁 선전의 브레인이라 할 수 있는 막칠팀의 주요 멤버는 박종규(주산면·42 ), 이재관(진서면·43세), 김귀숙(진서면·42), 장양선(변산면·38), 정병의(보안면·42)씨 등 다섯 명이다. 막칠하세 팀장을 맡고 있는 박종규씨는?인근 군산에서 벽화를 그려본 적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모두 처음이라고 했다. 장양선씨는 삽화를 주로 그려왔고, 정병의씨는 인쇄소를 운영하면서 익힌 실크스크린 기술을 갖고 있었다. 또?이재관씨는 울산에 있는 한 대기업 노조에서 노보 제작을 하면서 만평을 그려본 적이 있었다. 김귀숙씨는 남편인 이씨와 함께 부안으로 오면서, 이들의 ‘막칠’을 완성도 높게 마무리 작업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초창기 막칠팀의 활동은 주로 현수막에 집중됐다. 이들은 하루에 수십 장씩, 지금까지?총 3천5백여 장은 족히 넘는 현수막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이 만든 현수막에는 만화형식의 현수막이 눈길을 끌었다. 그러나 계속 뜯겨나가는 현수막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던 막칠하세팀은 어느날 막걸리를 마시며 “벽에다 칠해보자! 그러면 뜯길 걱정이 없지 않냐”며 벽화를 그리기 시작, 지난해 11월 22일 계화면 창북리에서 ‘막칠’의 불을 당겼다. 읍면단위 촛불집회가 진행되자 ‘막칠’에도 속도가 붙었다. 하루에 두세 군데씩 그려나가면서 올 1월말까지 총 2백여곳이 넘는 담장과 바닥이 이들의 벽화로 채워졌다.
막칠은 주로 노란 밑바탕에 ‘핵없는 세상’이란 글씨와 반핵마크가 한 귀퉁이를 채우고, 지역에 맞는 선전문구가 쓰여졌다. ‘산들바다가 아름다운 부안’이나 ‘대안에너지 개발’등의 문구 들이 대표적이다. 그림은 주로 아이나 노인, 여성들을 등장시켜 재밌는 삽화가 그려지기도 하고, 민화의 일종인 십장생도의 동식물들도 들어갔다. 바닷가 마을의 경우는 주민들이 꽃게나 꼴뚜기 등 특산물을 그려달라는 마을 주민들의 주문도 이어졌다. 2.14 주민투표 때는 투표참여를 촉구하는 그림도 등장했다. 특히 막칠을 두 달 넘게 지속할 수 있었던 것도 주민들의 호응이 컸기 때문이다. 벽화에 대한 반응도 좋았지만, 막칠팀이 작업을 하고 있으면 주민들이 커피를 타오거나 고구마를 쪄주곤 했다. 특히 주민들도 막칠에 한 몫 가세했는데, 막칠팀에 따르면 작업의 가장 기초가 되는 마감질과 바탕칠을 주민들이 미리하기도 해 한결 작업이 쉽게 이뤄졌다는 것이다.
막칠팀이 가장 자랑으로 여기는 그림은, 모항에서 격포가는 길에 그린 ‘담장 벽화’라고 입을 모았다. 또한 부안읍 선은동에 그려진 그림이나 상서 시내버스 정류장에 있는 벽화도 손꼽힌다. 막칠하세팀은 벽화 뿐 아니라 큰 걸개그림도 그렸다. 무대용 걸개뿐만 아니라, 아파트에 폭 3m, 길이 15m의 대형 걸개그림이 내걸려 한 때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한 겨울에 시작된 작업이라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페인트와 신나 냄새가 코를 찌를 기도 했다며 막칠팀 이재관씨 부부는 당시를 회고한다. 경찰이나 반대세력의 저지도 만만치 않아 벽화가 지워지기도 수십 차례였다. 그래서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 나중에 지워지더라도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있도록 ‘사용승인서’를 받아둬야 할 정도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나 막칠팀이 벽화그리기를 계속 지속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박종규씨는 “‘반핵’이라는 뜻이 같았기에 서로 어우러졌고, 서로 손발이 착착 들어맞아 공동작업이 잘 이뤄졌으며, 조금씩 개성도 살려나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또 무엇보다 당시 가장 큰 지원군은 “군민들이었다”고 말한다. “전날 쓰던 ‘촛동가리’라도 가지고 집회에 나오시는 할머니들을 비롯한 군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밝히며 “조만간 반핵싸움이 끝난다면 다시 한번 뭉쳐 진짜 멋진 작품을 그려보고 싶다”며 밝게 웃었다.

이향미 기자 isonghm@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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