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일 하시네요.”
내가 그들에게 들었던 첫마디다.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면 보는 이들의 반응은 대략 두 가지다. ‘참 좋은 일 하시네요’, ‘왜 밥을 줘요?’ 절대 비꼬는 말씨가 아님을, 따지듯 나무라는 투가 아님을 안다.
“왜 밥을 줘요?”
왜 줄까? 난 왜 그네들에게 밥을 줄까? 기억을 거슬러 가보자, 그 시초가 언제였는지.
15살이 훌쩍 넘은 아픈 반려견을 간호하는 동안 녀석 입으로 들어간 밥보다 버려지는 게 더 많았다. 우리 동네를 영역삼아 터 잡고 살던 고양이가 그것을 먹으려고 마당까지 들어왔고 그게 신기하고 요망져 보여 따로 챙기기 시작했다.
녀석의 발길은 끊어지고 한동안 잊고 살던 중 다시 고양이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다버린 치킨상자 속 기름기를 닦아낸 휴지를 누가 채어갈 새라 허겁지겁 먹던 고양이를 봐서일까, 그날 사냥을 허탕치고 갈비뼈 드러내며 터벅터벅 골목으로 올라오는 녀석을 봐서일까. 그렇게 그들은 여전히 고달픈 삶을 악착같이 버텨내고 있었다, 우리 곁에서. 오지랖과 측은지심이 기가 막히게 발동한 시점이다.
햇수로 6년째인 캣맘 간판을 달고 이제 길고양이는 안에서도 밖에서도 내 삶의 일부가 됐다. 20여 마리 길고양이들의 하루 한 끼 밥 배달에, 구조한 길고양이들을 반려묘로 삼아 먹여 살릴 식솔이 서른이나 된 것이다. 가장 최근 가족으로 입양한 녀석은 집 뒤 산책로에 누군가 유기하고 간 2개월 된 강아지다.
‘참 좋은 일 하시네요.’
난 ‘참 좋은 일’이 아닌 ‘당연한 일’로 사람들이 봐주길 원한다. 배고픈 고양이가 캣맘 덕에 조금은 편하고 안전하게 배고픔을 해소한 것에 ‘참 좋은 일 한다’ 말을 건넸던 사람들도 막상 그들 앞에 조금의 피해라도 있다싶으면 앞뒤 안보고 일언지하 밥부터 주지 말라 한다. 우리 인간들이 없애고 파헤친 땅위에서 매일이 살얼음 위고 풍전등화 같은 생을 살아내는 녀석들의 하루 한 끼는 간간이 들려오는 그네들의 울음소리나 밭고랑에 반쯤 파묻힌 배설물, 고양이 여럿이 모여 있는 모습이 혐오스럽다는 등의 불편과 피해를 감수하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좋은 일’이 아닌 ‘당연한 일’로 인식되고 더 나아가선 ‘길고양이’가 아닌 ‘동네고양이’로 바꿔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일본의 많은 지역에선 마을 구성원들이 함께 고양이의 중성화수술, 화장실, 먹이 등을 관리하며 공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장에 고양이를 배척해 갈등이나 불편을 임시 봉합하는 것이 아니라 영역동물인 녀석들을 마을이 책임지고 함께하는 대상임을 전제로 놓고 문제에 다가갔기에 갈등을 해소하고 체계적이고 인도적인 조절까지 가능해진 것이 아니겠는가. -누군가의 말을 빌려- 그 동물에게는 그 환경에서 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루 한번 적게는 수 마리에서 많게는 수십 마리의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다치거나 아픈 녀석들은 사비를 내 치료하며 직접 입양까지 하는, 중성화수술을 위해 –절대 쉬울 수 없는- 포획과 케어, 방사까지 홀로 하는 것이 지금 우리 부안군에서 캣맘들이 하고 있는 일이다. 이는 고양이에 국한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외면 받는 길 위 동물들과 유기를 포함한 학대받는 동물들도 당연 포함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바라보는 이때 우리는 언제까지 ‘사람이 우선이다’를 내세워 가축을 포함한 동물의 고통과 죽음을 무시하고 외면해 얻는 것을 당연시해야 하는가. ‘한 나라의 위대함은 그 나라 동물들이 받는 처우로 알 수 있다’ 19세기에 태어나 20세기에 사망한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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