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978년 1월과 82년 8월에 위도를 찾았던 풋풋한 추억이 있다. 78년에는 겨울 섬을 보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위도로 무작정 떠났던 독수리 5형제의 무모함이 있었다. 용케 벌금마을에 사는 후배를 만나 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지 않았다면 어느 골목에서 떨고 있어야할 처지였다. 배가 뜨지 못한 며칠 동안 우리는 눈 덮인 위도를 맘껏 뛰어다녔다. 82년 여름에는 벌금 동네의 낮은 산을 넘으니 확 트인 모래벌판 해수욕장을 만날 수 있었다. 아카시 나무숲은 울창했고 모래언덕도 큼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해변에 깔린 고운 모래는 뜨거운 태양에 금방이라도 녹을 듯 빛났다.
올 7월에 찾은 위도해수욕장은 개장이 됐는데도 썰렁했다. 옛날 아카시 숲이나 모래언덕은 간 데 없고 건물과 시멘트 계단이 바다를 가로 막고 있었다. 사람들은 바다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으로 모래언덕(사구, 砂丘)을 없애고 사빈까지 닿도록 길을 낸다. 해수욕장의 모래는 바람에 따라 뒤편의 사구에 쌓였다가 다시 앞 해변으로 ‘사돈 밤 바래기’처럼 오가기를 반복하는데, 사구를 없애니 사빈의 모래는 갈 곳을 잃고 바다로 휩쓸려가고 말았다. 이제 위도해수욕장은 검은 뻘 갯벌이 이곳저곳에서 드러난다.
이 날 만난 위도 토박이 한 분은 90년대의 해수욕장 개발을 환영했다고 자신을 돌아봤다. 그동안 소외된 섬 위도를 정부가 돈을 들여 개발한다니 그저 희망만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해수욕장 모래가 사라지는 처참한 결과를 보고서야 사구의 필요성을 알았다는 것이다. 시멘트 계단을 뜯어내서라도 사구를 살려야 해수욕장이 살고 위도를 찾는 관광객도 제대로 된 위도를 볼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제는 위도해수욕장 모래언덕의 복원을 평생 숙원사업으로 해야겠다는 의지도 보였다.
위도해수욕장의 본래 이름은 도장금해수욕장이었다. 도장금 마을에 있는 해수욕장이라는 소박한 이름이었다. 진리마을에 수군진(水軍鎭)이 주둔했을 때, 도장금 앞 갯벌이 수군의 도장(훈련장소)이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고 한다. 뜬금없이 붙여진 위도해수욕장이라는 이름보다는 본래 이름인 도장금해수욕장이라는 이름부터 찾아주는 것이 해수욕장을 살리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위도의 깊은금, 미영금, 논금해수욕장은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지역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많은 투자를 한다. 그러다 보니 옛 것은 그저 허접하고 불편한 것,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위도를 찾는 관광객들은 새로운 것을 보러 발품을 팔기보다는 때 묻지 않은 자연과 유구한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만나기 위함이 클 것이다. 5년 뒤, 10년 뒤 위도를 생각하면서 조상의 숨이 묻은 옛 것을 찾고, 위도스러운 것을 잘 갈무리하여 의미 부여를 고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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