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영 전북민주동우회장

지난 주말, 소수서원에 다녀왔다. 그곳에서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동양고전을 배우고 있었다. 이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의 초대를 받아 수업을 참관하고 학생들과 간단히 수인사를 나눴다. 삼복더위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선생이 모두 학창의를 걸치고 머리에는 건을 쓴 모습이 하도 엄숙하고 진지해서 오히려 약간은 희극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죄송스럽지만 그런 마음이 든 것은 사실이다.) 그들과 오늘날 유학이 이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지를 토론하며, 나는 속으로 4차산업혁명이 도래한 21세기에 양반과 선비가 과연 무슨 의미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양반은 조선시대에 와서 굳어진 말로서 지배집단을 가리킨다. 무반과 문반을 합해 양반이라 불렀다. 문반과 무반을 구분한 것은 서기 976년 고려 경종 1년 전시과를 실시하며 시작됐으나 그 당시에는 호족들이 지배층을 차지했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거친 양반들은 하급관료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 와서 과거제도가 자리를 확고히 잡으면서 새로운 관료층이 상류계급을 형성하고 특권을 가진 귀족으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라 하여 글을 아는 선비와 농업과 수공업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양민들이 있었는데 이를 사민(四民)이라 했다. 선비(士)는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을 해야 양반이 될 수 있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양반층은 본인을 포함해 4대조 중 관직을 보유한 사람이 있는 경우로 확장됐고, 군역이 면제됐으며, 어느 정도 치외법권을 누리는 특권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양반이 사회 계층을 가리키는 말인 반면에 선비란 인격적으로 훌륭한 지식인을 의미한다. 선비라 하면 보통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 유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지만 선비들 중에서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가기도 하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다시 선비로 되돌아오기도 한다. 그래서 공부를 하지 않았거나 공부를 중단하고 놀고먹는 사람에게는 비록 신분이 양반일지라도 선비라 불러주지 않았다. 나아가 중인계급이나 서얼 심지어는 농공상에 종사하는 양민일지라도 공부가 어느 정도 위치에 오른 사람에게는 선비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대접을 해주었다.
선비란 말은 원래 몽골어에서 유래했다. 선은 몽골어로 어질다는 뜻을 가진 ‘사인’이 어원이고, 비는 지식인이란 몽골어 ‘박시’가 ‘바이’로 다시 ‘비’로 바뀐 말이다. 그래서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인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양반과 상놈의 구분은 당연히 없다. 이미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양반과 양민 그리고 천민 등 모든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분제도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50년 이상 세월이 필요했다. 어쩌면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민간에서 양반과 상민의 구분은 더 오래 지속되었을 지도 모른다. 전쟁을 통해 사람들이 섞여 살게 되면서 반상을 따지는 사람은 고루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으며 돈의 유무가 그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뼈대 있는 집안이란 냉장고 속에 갈비뼈가 있는 지 없는 지로 구분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요즘 세태를 보면 새로운 신분제가 자리 잡은 것 같다. 부의 대물림이 심각하다. 빈부의 격차가 날로 심해지고 있다. 서울대 등 이른바 일류대학교 입학생의 거주지 분포를 보면 서울 강남지역과 기타 지역의 차이가 심각한 수준이다. 부모의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자식에게 대물림되면서 신분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1997년 금융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은 대부분 서민층으로 신분이 하락했으며 빈민층이 급속히 늘었다. 일반 가계부채가 100조원을 넘어 선지 오래인데 재벌 기업들의 유보금 합계는 1000조원에 육박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상류층 아이들은 사교육과 조기유학 등으로 스팩을 만들어 좋은 대학에 진학하며 물려받은 재산과 만들어진 학벌로 상류층을 유지한다. 조선시대 양반들끼리만 혼인을 함으로써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유지했듯이 요즘도 권력이나 부를 독점한 세력들끼리 혼맥을 유지하며 새로운 귀족층을 만들어가고 있다.
상위 1%로 자신의 신분을 올리고자 안간힘을 쓰던 어느 고위공직자는 일반 국민을 개돼지라 비하했다. 수해를 당한 자신의 지역구를 외면하고 해외여행을 떠났던 어느 도의원은 국민을 레밍이라는 쥐로 간주하는 말을 당당히 한다. 재벌 총수 혹은 그 일가들은 직원을 머슴 부리듯 군림한다. 이래도 새로운 양반층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주장을 헛소리라고 일축해버릴 수 있겠는가?
신라는 진골 성골이 권력을 독점하다가 멸망했다. 조선은 양반이 나라를 팔아먹었다. 인간 세상에 어느 사회인들 계급이 없을 수 있겠냐마는 계층 간에 이동이 수월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세습양반 대신에 참다운 선비가 주도하는 사회를 만들어 가자. 이것이 지난 주 소수서원을 거닐며 나의 뇌리를 맴돌던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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