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재근 전 부안독립신문 기자

얼마 전에 한 교수님이 SNS에 쓰신 글을 읽었습니다. 카이스트 IT경영대학원 이병태 교수님이 쓰신 ‘젊은이들에게 가슴에서 호소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입니다. 인터넷에 꽤 화제가 됐으니 저 성함으로 검색해보시면 금세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땅이 헬조선이라고 할 때, 이 땅이 살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욕할 때 한번이라도 당신의 조부모와 부모를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 주기 바랍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은 “우리 사회가 사람을 똥값 취급한다”는 젊은이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겪었던 고난과 극복의 여정을 설명하며 “응석부리고 빈정거릴 시간에 공부하고 너른 세상을 보라”고 훈계합니다.
이 글만 읽었을 때는 이 분의 응석과 빈정에 대해 잔뜩 빈정대주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제 부모님 세대쯤 되셨을 분들이 하나같이 공감을 표하고 계셨습니다. 이 깊은 골을 메우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래도 제게 이렇게 지면이 주어졌으니 조금이나마 오해를 풀고 이해를 돕는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모든 세대에는 그 세대의 십자가가 있다.” 유시민 작가가 한 방송에서 말했습니다. 젊은 세대의 십자가는 그들의 몫입니다.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는 일은 오해를 푸는데 도움이 될 겁니다. 저는 30대 중반입니다. 사실 요즘 젊은 세대, 즉 20대의 이야기를 하기에는 벌써 저도 세대차이가 꽤 나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풀어봅니다.
사실 청년층의 일자리 문제는 우리나라만의 고민이 아닙니다. 전 세계, 특히 선진국들이 비슷한 난관에 봉착해있습니다. 고성장의 시대에는 할 일이 많았습니다. 사업이 빠르게 커지면 고용이 늘어나고, 늘어난 고용의 소비를 감당하는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면서 선순환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고성장의 연료가 소진된 후 맞이한 저성장의 시대에서는 모든 게 고착됩니다. 고용도, 소비도, 소득도 제자리를 맴돕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계층 간 이동성도 줄어듭니다.
작은 기업에 들어간 청년들은 저임금 때문에 미래를 그리기 힘듭니다. 비정규직은 더더욱 그렇겠지요. 대기업에 들어간 청년들도 40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걸 잘 압니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가져오고 불안은 공포를 부릅니다. 공포는 사람을 좀 먹습니다. 이미 유행어가 된 금수저, 흙수저 계급론처럼 계층은 세습되어 굳어집니다. 상대적 박탈감이 또 한 번 청년들을 좌절에 빠트립니다.
뿐만 아닙니다. 세계는 이제 4차 산업혁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일자리 상당수를 인공지능과 기계가 대체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인 애플이 고용하는 노동자는 불과 9만7천여 명입니다. 기술 혁신은 더 적은 고용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부는 소수에게 집중됩니다. 과거에는 평생 벌어 집 한 채를 장만한다했으나 요즘 수도권에서 월급을 모아 내 집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임금이 제자리걸음인 동안 집값은 하늘 높이 뛰었습니다.
기성세대의 고통은 배고픔이었고 행운은 고성장사회의 기회였습니다. 요즘 젊은 세대의 행운은 굶주림의 공포를 벗어난 것이나, 고통은 저성장의 불안입니다. 무엇이 낫고 무엇이 더 힘든가를 따질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가 다 고민인데 한국 청년들만 유난이냐고요? 사실 다른 나라 청년들도 조용히 있진 않지만, 어쨌든 한국만의 고유한 문제도 있습니다. 서구 선진국들이 고성장의 기간 분배를 강화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하는 동안 우리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빈부격차의 확대와 중산층의 붕괴가 더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래 없이 빨랐던 압축성장도 갈등의 원인입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는 농업과 경공업중심 세대, 중공업중심 세대, 서비스산업 세대가 한 사회에 살고 있고, 문화적으로는 식민지시대, 권위주의시대, 자유주의시대에서 각각 자라온 세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기술혁신의 속도가 인류사에서 가장 빠른 시대입니다. 어른들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기술에 대한 배움을 구해야하는 초유의 시대가 됐습니다.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촌 사이에도 시대적 격차가 존재합니다. 우리는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원래 젊은이와 기성세대는 항상 갈등하기 마련인데 이런 조건까지 갖춰졌으니 유난하지 않을게 이상한 일입니다.
어른의 지혜가 젊은이들을 깨우치는 일은 인류의 집단생활 이래로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이었습니다. 그러니 조언을 하시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말씀을 하느냐보다 어떻게 말씀을 하시느냐에 조금 더 신경을 써달라는 뜻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주고, 더 따뜻한 말로 위로하신 다음에 지혜를 주신다면 더 많은 젊은이들이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는 마음에 두지 마시고 허허 웃어주십시오. 그 복수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이 해줄 겁니다. 만약 그 때 그가 “내가 젊을 적에는 말이야~”하는 꼴을 보신다면 “쯧쯧” 혀를 차며 “어린놈이 꼰대질 한다”고 꾸짖으셔도 좋겠습니다.
어른들께서 그 전 세대와 갈등하며 이 나라를 일궈 오셨듯, 부족해보여도 젊은 세대들 역시 시대적 소명을 해낼 겁니다. 분명 세상이 전보다 많이 좋아졌지 않습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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