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관내 학교에서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성추행을 일삼고 폭언과 선물을 강요했다는 등의 주장이 제기되며 전국에 이슈가 됐다.
부안에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서 학생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기자는 지난 4일 전북교육청 인권옹호관·학생인권교육센터 염규홍(54) 센터장을 만나 인권이 무엇이고 학생들의 인권은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들어봤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이 길을 걸어가게 됐는지도 살짝 들여다봤다.
염색을 하지 않고 그저 자연스럽게 쓸어넘긴 흰 머리에 많은 사연들이 담겨 있을 듯 했다.
-어떻게 학생인권옹호관의 길을 가게 됐습니까?
“사연을 얘기하자면 깁니다. 사실 원래 꿈은 시골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부모님은 바람은 판검사나 한의사였어요. 태어난지 6개월만에 소아마비를 앓아 장애를 갖게 됐는데 아버지께서는 제가 힘든 일을 하기 어렵다고 보셨나 봐요. 그래서 중학교 3학년 때 서울로 전학을 가게 됐어요.”
하지만 그의 서울 생활은 낯설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
“저는 자연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게 바람이었어요. 그래서 꿈도 부모님의 기대와는 달리 시골학교 선생님의 길을 준비했어요.”
그런데 고3때 커다란 사건이 하나 벌어지며 그 꿈은 산산조각난다.
“1982년 8월쯤 이었을 겁니다. 1980~1981년 발생된 사건이었는데 체육교사가 중학교 2학년 학생을 유괴하고 성폭행한 사건이 언론에 떠들썩하게 보도 됐어요. 그 때가 전두환 정권시절이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사대와 교대는 남에게 혐오감을 주는 자는 정부에서 뽑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속에 장애인도 포함 됐습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했죠.”
이 일로 염 센터장은 대입을 앞 둔 중요한 고3시절에 한 달여간 방황을 하다가 교수라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또 우리말이 만들어지는 원리를 연구하고 싶었다는 그는 동국대 국문학과에 입학한다. 4년 장학생으로 등록금과 생활비 등 1년에 300만원을 받는 혜택을 받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그의 대학생활은 시작됐지만 대학교 생활은 염 센터장의 생각과는 달랐다.
“당시는 대학교에 사복경찰이 배치됐었던 시기로 정권에 맞선 ‘비합조직’이 결성돼 활동하던 시기였어요. 3학년 때인가. 친구가 총학생회장 선거 준비를 같이 하자고 했는데 저는 옆에서 돕기만 한다고 했죠. 그런데 총학생회장 발대식 날 그를 잡아갔죠. 결국 1년 6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혀 있게 되자, 그 해 가을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운동권 후보의 선거 책임을 맡아 진행했죠.”
그는 대학 생활을 하면서 ‘대중불교’ 잡지 회사에 기자로 취직을 한다. 
“정권의 불교탄압에 맞서 1986년 9월에 해인사에서 불교자주화를 주장하는 승려대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한국불교청년승가회’가 만들어지고, 거기에서 ‘대중불교’ 잡지가 만들어졌죠. 저는 이곳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불교에 새바람을 일으키는 인물이나 민주화 투쟁인물 등을 소개하는 일을 주로 취재했죠.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 정부는 간첩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군인들이 사찰에 들이 닥쳤고 스님들을 마당에 무릎을 꿇게 하는 법난을 일으켰고, 진보적인 불교계에서는 80년대 내내 1980년의 ‘10.27법난’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투쟁이 벌어졌죠.”
그러던 중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 낮에는 시위현장 참여하고 밤에는 취재 현장을 누비다가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다. 그 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잠시 시골 고향에서 쉬다가 민주동문회운동이 일어나 대학교 민주동문회의 간사로 1년정도 일을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기 위해 1989년에 대학원에 진학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1989~1991년초까지 문익환 목사 방북사건이 터지면서 공안탄압이 시작되었고, 1991년에는 학생들이 연이어 분신하는 등 민주화 투쟁이 최고조에 달했다. 염 센터장은 이런 정국에서 공부를 계속해야 되나 생각을 하면서 결국 대학원을 그만 두고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는 1992년 2월 강기훈씨 유서사건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으면서 인권운동의 첫발을 내딛는다. 염씨는 3000페이지가 넘는 유서사건 자료를 정리해서 1993년 출간을 한다. 이때 염씨의 나이 30이다.
본격적인 인권운동은 ‘인권운동사랑방’ 단체 창립멤버로 들어가면서 활동이 시작된다.
염씨는 인권운동사랑방 회원과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인권운동 간사 일을 1년간 겸임하면서 ‘인권하루소식’이란 신문을 발행한다. 이 신문은 A4용지 두 장 분량으로 주말을 제외한 매일 팩스로 구독자에게 전송하는 시스템이다. 처음에 50명이던 독자가 1000여명으로 늘어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는 주로 인권에 대한 소식으로 인권단체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취재해 기사화 했다. 원진레이온 직원들의 직업병 문제,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등을 소개하며 새로운 인권의 지평을 연다.
이 같은 경험으로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팀장으로 2003년까지 근무하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제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1과장을 역임하며 당시 안기부 등에서 일어난 장준하, 이내창, 이철규, 박창수 열사 의문사 사건을 조사하며 2004년까지 조사과장으로 활동을 한다.
또 재직 기간 중인 2004년, 서울시 수유리에 삼각산재미난학교란 대안학교를 설립하는데 동참하며 아이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처음 15명의 학생수로 시작한 학교는 40~50명으로 늘었고 식당과 카페도 생겼다. 대안학교는 아이들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다.
“어느날 아이가 3~4개월 유치원을 다니다가 너무 가기 싫어하고 그 곳 가까이만 가면 우는 겁니다.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공동육아’를 알게 됐고 이곳에 아이를 보냈는데 유치원과는 다르게 놀이중심의 교육으로 아이가 재미있어 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경쟁중심의 삶보다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한다.
“경쟁중심이 아닌 서로를 살리는 교육, 서로 돕는 교육, 자연을 알고 살아가는 교육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큰아이를 변산공동체학교를 보냈고 그러면서 부안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지난해부터 부안 변산에서 살면서 전북도교육청 학생인권옹호관·학생인권교육센터장으로 일하고 있다.
“학생인권교육센터는 전북도교육청 산하기관입니다. 학생들의 인권에 대한 상담과 교육을 맡아 진행하고 있는데 이곳에 온지 이제 100일이 조금 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는 교사들이 갖춰야 할 덕목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인권이라고 말한다.
“흔히들 어떤 잘못을 하게 되면 교사들의 도덕과 인성을 강조하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인권을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최근에 일어난 부안여고 사태도 학생들의 인권을 무시한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와 지금은 많이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권에 대해서 모릅니다. 교사들도 별반 다르지 않죠. 때문에 정기적인 교육이 필요합니다.”
염 센터장은 학생들에 벌을 세우고 따귀를 때리는 것도 인권을 존중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고 얘기한다.
“어른들은 기존의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 나이 때 아무렇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행동을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신체변화 때문에 접촉에 예민한 여학생들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대부분 교사들은 칭찬이나 격려의 의미에서 어깨를 토닥거리고, 머리를 쓰다듬는 등의 신체접촉을 하지만 지나치면 학생들은 성희롱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어적 비하발언, 다른 학생과 차별적 대우, 학교 성적관련한 차별 모두 인권을 무시한 행동 입니다.”
그는 이번 부안의 사건을 보고 학생들의 인권의식이 높다고 말한다.
“성추행, 폭행 등의 사건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납니다. 그런데 부안은 학생들이 나서서 이 문제를 밝혔습니다. 그만큼 학생들의 인권이 성장한 것이죠.”
염규홍 센터장은 인터뷰 말미에서 성추행을 비롯한 성폭행, 언어폭력, 차별 등을 본인이나 다른 학생들이 당했다면 언제든지 센터에 연락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는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철저한 비밀보장과 함께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며 “학생인권교육센터의 문은 언제든지 열려있으니 문제가 있으면 혼자 고민하지 말고 꼭 연락해 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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