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에는 고개를 넘어야 만나는 아름다운 곳이 여럿이다. 상서면 청림 지역도 그 중에 하나다. 청림의 네 개 마을은 산으로 둘러싸여 옹기종기 모여 있다. 청림마을은 다른 마을에 비해서 크지만 지금은 할머니들이 옛 집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청림마을에 관한 얘기를 전한다.

  “변산에 있는 큰 절에 적도들이 들이닥쳐 절의 중을 불러서 말하기를, ‘삼동(三冬)에는 밖에 거처할 수 없으니 너희들이 우선 절을 빌려 주어야겠다’ 하자, 중들이 두려워 감히 따지지 못하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흩어져 갔다고 합니다.”
-영조 3년 1727년10월 27일-

여기서 큰 절은 청림 마을에 있는 청림사(靑林寺)이고 중들이 쫓겨난 삼동(三冬)은 만물이 얼음 속에 덮인 추운 3개월을 말한다. 청림사를 차지한 이들 변산도적은 다음해에 일어난 무신의 난 때, 청림병(靑林兵)이라는 이름으로 참여한다.
청림사는 ‘변산의 4대사찰’로 불릴 정도로 이름 있는 절이었지만 지금은 폐사지가 되었다. 청림사는 두 가지를 남겼다. 하나는, 청림사 고려동종과 절 자리의 우물이다. 현재 동종은 내소사로 자리를 옮겨갔고, 우물은 지금도 그 자리에서 찾는 이들을 맞는다.
청림 사람들은 이 우물을 박적시암이라 불렀는데, 무릎을 꿇고서 바가지로 물을 퍼야 하는 석간수다. 6~70년대까지만 해도 청림마을에는 50여 가구에 300명 정도가 살았는데 이들 모두는 이 우물을 먹고 살았다. 가물이 들면 물량이 적어서 늦은 밤에 물동이를 놓고 오래도록 기다렸다가 물을 떠갔다. 70년대 새마을 사업으로 우물에 시멘트 덮개를 만든 것 외에 우물은 옛날 그대로다.
식수야 박적시암 물로 해결하지만 삼시세끼 먹어야 할 밥이 문제였다. 자급자족이 되지 않으니 밭작물과 산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여자들은 나무를 쪼개서 10개를 1포로해서 6포 정도를 머리에 이고 부안으로 팔러나갔다. 주로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40리길을 걸어간 것은 감수라 불리는 산림감시원이 지키고 있다가 나무를 빼앗고 벌금까지 부과하는 것을 피해야했기 때문이다. 밤 12시 정도에 출발해서 우슬재를 넘어서 걸어갈 때는 잠이 모자라 장동리 모정에서 한잠을 자고 가기도 했다. 부안읍의 구시장에는 나무시장이 섰고 읍내 사람들이 땔감으로 사갔다.
청림의 어머니와 두 아들이 나무를 이고 지고 깊은 밤을 지새우며 나무시장에서 거래해서 받은 돈으로 겉보리 두되를 팔았다는 것으로 이들의 고단한 삶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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