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정유도를 믿는 머리 딴 남자 아이들을 만났다. 이들은 우리가 입은 옷과는 다른 조끼 있는 한복을 입었다. 건물 안은 낮인데도 어둑하여 모든 것이 낯설고 바다의 비릿한 공기가 몸을 감싸고 젓갈 냄새도 났다. 간혹 한글을 모르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00가는 차가 어딨냐”고 묻기도 했다. 버스에는 세로글자로 행선지를 큼지막하게 써서 차 유리창 앞에 붙였다. 1960년대 사람들로 북적인 부안 배차장(터미널) 모습이다.
  버스들이 부안 구석구석을 다 가는 것은 아니었던가 보다. 웬만한 곳은 걸어 다녔으니까. 어렸을 때, 동진면 쑥대골의 외갓집 갈 때면 멀다거나 힘들다고 생각한 적 없이 그저 풍선 같은 기대를 가지고 걸었다. 옛 동초등학교 운동장을 가로질러 성황산 밑의 이관집이라 불리는 한옥 마을 지나면 성황산 중턱에 띠처럼 이어진 산길에 들어선다. 성황산 끝물 신선마을과 아리랑고개를 지나서 한가매마을과 고개를 넘으면 물 좋다는 옹달샘도 만난다.
  지네리(지비리) 방죽은 거대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는다. 방죽 옆 솔밭 길 생각난다. 솔 냄새가 진하고 해질녘에는 방죽으로 들어간 산 그림자가 무서운 짐승처럼 어린 가슴을 눌렀다. 앞주막 지나고 궁동마을 지나서 외갓집이 있는 쑥대골, 내동에 들어선다. 안골 정도로 말할 수 있는데, 밖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큰 길에서 고개를 딱 넘으면 암탉이 알을 품듯 보이는 전주이씨 성받이 동네다.
  외갓집만 생각하면 배가 불렀다. 먹을 것도 먹을 것이지만 어머니가 업어 키웠다는 막둥이 삼촌은 조카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고 살가웠다. 삼촌은 기타를 치고 지금 같으면 만화영화 같은 동물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어린 나에게 음악과 이야기 등의 감성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할까. 늘 고마운 분이다.
  이제는 걷는 사람들이 없다보니 석정선생이 황계재라 했다는 성황산 중턱의 길도 끊겼다. 산을 지나면 만나는 큰 찻길이 사람들이 오가던 길을 점령했고 큼지막한 농공단지도 들어섰다. 지네리 방죽, 앞주막, 궁동마을은 이제 이름으로만 남았다.
  부안 읍내에서 이곳저곳으로 나 있는 작은 길 걸어 고향집 찾던 사람들의 옛 얘기가 수북하게 쌓여있다. 옛 길에 애정을 가지고 추억이라도 기록 할 수 있다면 어린 날의 상실을 치유하는 작은 위로가 될 것이다. “아, 그때가 언진디, 그런 쓰잘대기 없는 얘기하냐”고 핀잔해도, 어린 날의 추억이 봄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마냥 억누를 수만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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