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재근 전 부안독립신문 기자.
봄은 소리 없이 온다. 그제는 앙상했던 가지에 어제는 꽃망울이 맺히더니 오늘은 어느새 활짝 꽃이 피었다. 어제는 분명 기미가 없었는데 오늘 활짝 핀 꽃을 보면 참 신기하다. 내가 어제 잘 못 봤던 걸까하는 의심도 들고, 너무 무심하게 살고 있나 반성도 한다. 가끔은 꽃나무 앞에 의자를 갖다 두고 꽃이 피는 과정을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다큐멘터리의 초고속카메라 화면처럼 꽃잎이 기지개켜듯 펴지는 걸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욕심이다. 그러든 저러든 꽃은 피고 또 지고, 세월은 참 소리도 없이 잘 흘러간다.
세상사도 그런가보다. 지난 10년의 겨울이 참으로 길더니 수백만의 촛불 꽃이 피어나자 혼비백산 꼬리를 감춰가고 있다. 어제는 못 봤던 꽃처럼 촛불은 갑자기 흐드러지게 피어서 봄을 불러온 듯 보인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게 또 하루아침만의 일은 아니다. 짧게 보자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승리 이후로, 2013년 겨울에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 바람이 대학과 사회를 조용히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철도민영화 반대 총파업이 이어졌다. 2014년 세월호의 참사가 일어났고 사람들은 피울음을 토하며 거리로 나섰다. 2015년에는 민중총궐기에 참가한 농민 백남기 씨가 물대포에 쓰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쩌면 이렇게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한탄했지만, 1년 후 그 피와 땀과 눈물은 기어이 꽃을 피워냈다. 우리는 꽃이 피고 나서야 봄이 온 줄 알지만, 꽃은 결과일 뿐 봄을 만드는 노력은 그 전부터 일어난다. 기온이 오르고 일조량이 늘어나면 식물은 뿌리부터 줄기까지 천천히 변한다. 우리가 보고 듣지 못할 뿐이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변화의 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 전국노래자랑의 국민MC 송해씨가 방송통신심의위원해로부터 품위유지 위반으로 권고 의견을 받았다. 방송에서 출연자인 남자 어린이의 ‘고추’를 만져 시청자들의 항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최고령MC로 유명한 송해 씨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 역시 어르신들이 그런 행동을 할 때 나서서 말릴 생각을 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남의 성기를 만지는 게 문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솔직히 고백컨대 나는 요즘 자주 뉴스를 타는 대학 선배들의 갑질 논란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이다. 대학신문사에 있을 당시 나는 전통에 따라 기합을 받고 술사발을 마셨으며 선배가 된 이후 기합을 주고 술사발을 돌렸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바꾸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행위가 폭력임을 안다. 그게 폭력임을 인식하고 용기 있게 행동해준 사람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여성혐오 논란이 한창 인터넷을 달구기 전에 나는 여성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면서, 택시를 이용하면서 그토록 공포를 느끼는 줄 상상도 못했다. 가사와 육아의 ‘독박’과 학교와 직장에서의 성희롱과 차별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그토록 심각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들이 ‘시끄럽게’ 외쳐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문제를 알게 됐고 내 인식을 바꿀 수 있었다.   
봄을 맞이하는 식물이 그렇듯, 이런 작은 인식의 변화들이 진짜 꽃을 피운다. 대선도 마찬가지다. 어느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그가 내일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 기대를 퍼트리는 사람, 장담하는 사람 모두 사기꾼이다. 새 대통령은 지금껏 쌓인 작은 변화들의 결과물이며, 그 스스로도 앞으로의 작은 변화들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큰 기대는 큰 실망을 불러온다. 과정을 모르고 결과만 보면 그런 함정에 빠지기 쉽다.
사족을 한 가지 덧붙이고 싶다. 사실 잡초가 자라고 해충이 퍼지는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사소한 악담이, 작은 차별이 쌓이고 쌓여 커다란 부정적 변화를 가져온다. 우리도 겪었다. 5.18에 대한 음해가 그러했고, 지역차별도 그러했고, 소수자에 대한 차별들이 그러했다. 미국에서는 그 결과가 트럼프로 나타났다. 우리도 또 다시 미래의 트럼프를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하고 두려워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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