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시인. 생명평화결사 운영휘원장)
벚꽃이며 살구꽃, 배꽃, 복사꽃 등 화사한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4월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꽃 구렁에서 4.16 참사 3주기를 맞는다. 화사한 아름다움도 슬픔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세월이다. 하지만 마냥 슬퍼하고, 마냥 기억만 하라는 것은 진정한 답이 아니어서 우리는 오히려 세월호를 통해 ‘희망의 길을 걷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빛은 어둠으로부터 오듯, 반드시 세월호라는 슬픔으로부터 희망이 오리라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일단 세월호의 궤적을 끼고 걷기로 하고 2016년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시흥-안산-화상-평택-아산-태안-서산-보령-서천-군산-부안(새만금)-고창-영광-함평-무안-목표-해남-진도 팽목항까지의 700km를 45일 동안 서해안을 따라 순례했다. 그 길을 맨 앞에서 걸은 이들은 중학교 과정의 아이들이었다. 미래의 희망들이었다.
모든 희망은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는 앞서 걷는 천진한 아이들을 보며 사심 하나 없는 저 천진성이 우리의 믿음이고 희망의 태극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2017년을 맞으며 세월호의 슬픔을 희망으로 변주해낼 완성도 높은 순례길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보면, 2014년 세월호 사건 이후 많은 생각과 의견들이 있었고, 우리의 역사는 세월호 이전과 세월호 이후로 나눠져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었다. 그만큼 세월호 사건은 어떤 역사적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사실 세월호 사건의 배경에는 이런저런 부정과 부패, 권력과 이권 등 디테일한 팩트들이 있겠지만, 크게 보면 자본문명의 말기 증상이라고나 할 수 있는 문명의 위기를 짐작하게 하는 징후를 너무나 뚜렷이 가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단연 생명경시의 삶이다. 말로는 늘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나’라는 이기적인 개인의 생명의 경우에만 해당될 뿐, 자연이라는 거대한 하나의 생명체나 그 안의 모든 보편적 타자의 생명과는 좀 거리가 먼 이야기들이었다. 자본문명의 이데올로기는 생래적으로 물량주의, 경쟁주의, 속도주의, 개인주의 등의 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본질적으로 생명가치를 우위에 둘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근대의 시작과 함께 우리의 일상에 노골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오랜 습(習)으로 굳어져 있는 그것이다.
이것들의 본질은 탐욕에 다름 아니며 자본주의는 인간의 탐욕을 정당화시킨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물론 자본은 원시 생존의 사회로부터 진화해오는 동안 많은 편리와 풍요를 가져오기는 했지만, 지금의 자본주의는 물질의 가치, 돈의 가치를 최상에 두면서 그 본래 목적을 잃고 반생명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념으로 탈색되었다. 이 시대의 세월호 사건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의 자본문명을 종식하고 새로운 문명으로 점프해야하는 국면에 이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사건은 이러한 모든 것을 함축, 상징하고 있는 사건인 것이다. 그래서 세월호 사건은 희망이 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희망의 출발점이다. 세월호의 슬픔은 새로운 사회, 새로운 이데올로기,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암시하는 슬픔이다. 지금의 나, 지금의 우리를 버리고 새로운 나, 새로운 우리를 세워내야 하는 희망의 슬픔이다. 그 구태를 버리고 환골탈태해야 하는 이 21세기의 벽두는 어쩌면 인류의 한 단계 점프를 위해 모두에게 다가온 절체절명의 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과 각오로 4.16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4.16은 그저 언젠가 잊게 될 하나의 불행한 참사에 불과할 뿐이다.
‘세월호 희망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런 생각의 돌파구로써 그 존재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2017년에 들어 작년에 걸었던 그 길을 재정비하여 완성시킨 다음 전 국민과 함께 순례하고자 한다. 그것은 새로운 나, 새로운 사회, 새로운 나라, 새로운 문명을 서원하는 우리의 첫 발걸음이 될 것이다. 슬픔에서 희망으로 가는 이 꿈은 모두가 주체로 서서 앞장서야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지난해의 촛불처럼, 우리는 모두가 하나 되어 순례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희망을 만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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