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핵 성과는 생명의 가치와 연결돼야

지난 1월부터 본보에 ‘희망’을 주제로 연재해 오고 있는 홍성담 화백과 마주앉은 건 9월 3일 부안성당 사제관에서였다. 마침 광주에 모임이 있어 내려왔다가 잠시 들렀다는 홍화백은 담배를 피우지 않으면 말이 잘 안 나온다며 디스플러스에 불을 붙이더니 2시간에 걸쳐 그동안의 근황을 들려주었다. 여전히 그는 광주의 5월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나 또한 그는 순수를 찾아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모던보이’였다. - 편집자 주

ⓒ 염기동 기자
근황이 궁금합니다.

-작년에 늦깎이 결혼을 하고 안산에다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데 상당히 글로벌한(국제적인) 도시라는 생각이 듭니다. 반월공단과 시화호가 안산에 있잖습니까. 그리고 하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이주입니다. 이제 외국인 거리가 생겨날 만큼 그 숫자가 제법 많아졌는데, 그러다보니 외국인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지고 있음을 봅니다. 아직 구체적인 틀은 마련하지 못했지만 이들과 문화활동을 중심으로 일을 꾸려나갈 계획입니다.

안산에 둥지를 틀기까지 그 여정도 만만치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 광주에서 70~80년대를 보냈고, 97년도에 잠시 상경하여 서울과 일산에서 보낸 적이 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면 이탈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사자인 나로서는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합니다. 예술하는 사람이 한곳에 너무 오래 머물다보면 고여서 썩어버릴 수 있거든요. 끝없이 부유하는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의 여정이라고 할까요. 예술가는 역에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니라 간이정류장에서 언제든 떠날 채비가 되어 있어야 길(새로운 세계)을 발견할 수 있지요.

전시회 소식이 들려오던데.

-올해는 전시회 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올 2월 일본 오끼나와에서 전시회를 했고, 5월에는 아테네에서, 며칠 뒤에는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전시회가 있습니다. 그리고 11월에는 오사카여자대학에서 전시회가 있고, 12월에는 교토시립미술관에서 전시회가 있습니다.

국내보다는 국외에서 전시가 많은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그리고 오끼나와는 잘 아시다시피 28%가 미군훈련지입니다. 어떤 공간보다 오끼나와 전체가 생생한 현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지금까지 크고 작은 전시회를 해왔지만 오끼나와만큼 기억에 남는 전시회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군기지 반환을 요구하는 그곳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가장 기분 좋은 전시회를 치렀으니까요. 그리고 또 하나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의 유일체제와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시대로 하여금 여기저기서 국가폭력에 대한 징후가 감지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초청자들이 원하는 그림의 내용을 보더라도 알 수 있는데 대개가 5월과 관련한 국가폭력과 맞닿아 있습니다. 80년 5월에 어떻게 당했으며, 그 5월을 어떻게 극복해왔는가 하는 전시회와 강연이 주를 이룬다고 할까요.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1980년 5월에서 나는 당사자나 다름없었고, 학살자 처벌을 시작으로 진상규명에 이르기까지 쭉 그 일을 해왔습니다. 그 때문인지 나는 그것이 제주의 4·3이든 광주의 5·18이든 국가폭력은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로 환원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 소임이 나에게 주어진 소명임을 잘 알고 있고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에 대한 욕심을 좀 버려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이곳 부안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는지요.

-대학 다닐 때였습니다. 칠십삼사년도로 기억되는데 방학을 맞아 동학농민혁명 전적지를 무전여행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부안을 처음 와봤는데, 어떤 시골집에서 하룻밤을 묵던 중 융숭한 대접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날 저녁 한문학에 밝아보이던 주인집 노인이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세상사를 들려주었지요. 그런데 그날 들은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손을 내밀면 만져질 것 같은 어떤 분위기만은 남아 있다고 할까요. 그래서 그 분위기가 훗날 체온을 따뜻하게 해주는. 그리고 또 하나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입니다. 내 성이 홍씨여서 그런지 홍길동을 쫓다보니 변산을 후천세상으로 보는 관념이 생겨났고, 변산에서 오끼나와 율도까지 이어지는 홍길동의 행적이 문득문득 상상의 나래로 펼쳐지곤 했습니다.

ⓒ 염기동 기자
홍성담 화백 하면 광주의 5월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은 그보다 이면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부터 들려주시지요.

-솔직히 고하면 공부를 못해서 미대를 갔습니다. 마음 같아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으나 점수가 나와야 말이지요. 그리고 하나 빠트릴 수 없는 건 초등학교 4학년 때 보았던 마을(홍 화백은 신안군 하의도에서 출생하여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목포로 나와 중·고등학교를, 그 후 조선대학교 사대 미술학과를 졸업했다)의 씻김굿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나한테 어려운 숙제 하나가 주어졌습니다. 바다에서 어부가 죽었는데 사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체 대신 제웅을 만들어 하늘나라로 보내는 굿판이 벌어졌는데 문제는 그 허수아비에 눈과 코, 입을 그릴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무당이 대뜸 나를 지목하더군요. 나더러 그걸 그려보라는 것이지요. 어른들도 부추기고 해서 하는 수없이 그리게 되었는데 무당이 정말 살아 있게 그렸다며 어찌나 칭찬을 하든지요. 무당의 그 칭찬 한마디가 미대로 길을 열어주었고 그 한마디가 오래도록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아무튼 그 당시는 무당이라는 존재가 내 어머니 같고 할머니 같아서 안기고 싶은 충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도 화가로 나서기까지는 출생이나 유년의 향수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나는 시골의 향수보다는 도시의 뒷골목이 정서에 맞는 것 같습니다. 철지난 모던보이라고 할까요. 이것은 일본을 갔을 때 경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곳에서 뒷골목을 걷고 있는데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든지요.

그렇다면 뒷골목을 통한 나름의 예술론도 갖고 있을 것 같은데요.

-예술은 기본적으로 창조행위라고 봅니다. 인간으로서 신의 영역에 가장 근접하게 다가갈 수 있는 합법적인 존재들이 바로 예술가니까요. 그래서 예술가들은 오랫동안 신을 찬양해왔습니다. 그만큼 창조행위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는 징표이겠지요. 하지만 예술이 거기서 그쳐선 안 된다고 봐요. 생명성을 가지면서 사회 속으로 파고들어야 하고 그 사회를 간섭해야 하니까요. 그러기에 예술은 자유의 갈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자유를 억압할 때 거기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 예술의 기본원리잖아요. 그래서 나는 박정희나 전두환 권력에 맞서는 일이 특수한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고 보편적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백지론을 들고 싶습니다. 하얀 백지는 사람의 손때가 타면 바로 얼룩이 집니다. 순수는 이처럼 민감하지요. 그런데도 어떤 예술가들을 보면 저항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손때가 묻어 회색으로 변해 가는데도 무감각할 따름이지요. 물론 거기에다 그 어떤 칼라를 칠해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도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게 어떻게 순수예술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회색예술이지. 순수예술이란 적어도 자기 삶의 자리, 삶의 풍경에 민감한 반응을 보일 때 가능한 것이거든요.

2005년 1월부터 본보에 ‘희망’을 주제로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주제를 ‘희망’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요.

-글쎄요. 문규현신부님과는 감방동기입니다. 당시 바깥세상에서는 저를 구명하기 위한 일종의 행사로 ‘5월에서 통일로’라는 문집을 만들고 있었는데 문신부님이 몰래 서문을 써서 내보낸 일이 있습니다. 작년 늦깎이 결혼 때는 주례까지 서주셨고요. ‘희망’이라는 주제는 문신부님이 착안한 것인데 처음엔 적잖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과연 이게 잘 될까, 그래도 격주 연재인데 펑크나 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지요. 그런데 궁합이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림을 먼저 그리기도 하고, 글을 먼저 쓴 다음 전화를 걸어오기도 하는데 그럴 때 마음이 묘해집니다. 시간적인 여유만 있다면 직접 부안에 내려와 1박하면서 그리는 게 도리고 그래야 부안을 잘 담을 수 있잖아요. 이런 것들이 아쉬움으로 남곤 합니다.

핵폐기장 싸움도 이제 일단락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치유를 넘어 상생과 화해가 시급한데 한 말씀 남겨주시지요.

-희망은 치유의 첫 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은 핵폐기장 승리 이후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대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핵폐기장은 단순한 핵폐기장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얄팍한 전술만 승리로 남아선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문화적 형태입니다. 그 동안의 싸움에서 많은 벽화와 걸개, 글들이 나왔을 줄 압니다. 이것을 잘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아마 러시아의 고리끼나 숄로호프만 봐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러시아 민중들의 숨결로 남아 강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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