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에너지 국장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일천만명이 넘었다는 엄청난 기록이다. 하루 최대 2백만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에서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시청, 그리고 종로통과 서대문까지 거리는 차 대신 사람들이 차지했다. 백만명이 넘는 촛불시위대가 연출하는 촛불 파도의 장관을 보고 있노라면 역사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자각과 함께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집회는 시종일관 흥겹고 평화롭다. 작은 사고라도 날만 한데 사람들은 서로서로 조심하고 배려하며 장관을 연출했다. 경찰은 시위대의 행진을 청와대 앞 100미터까지 내주었다.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에 분노한 시민들은 퇴진 요구를 새로운 문화로 승화시켰다. 다양하고 기발한 깃발과 손피켓이 바다처럼 한데 흘렀다. 아이부터 어르신들까지 가족단위 참가자들은 산책같은 행진을 함께했다. 중간중간에 사람들이 모여 시민들의 즉석 연설이 이어졌다. 시민단체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을 지도하거나 지휘하지 않는다. 단지 장을 제공할 따름이다.
이 역사적인 촛불집회 문화에 대해서 사람들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를 떠올리는데 사실 그 모태는 부안주민들이 보여주었던 2003년 부안핵폐기장 반대 촛불집회였다.
지금은 해체되고 없는 전투경찰이 시위대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던 시절이었다. 전경들은 금속 방패를 시멘트 바닥에 갈아서 시위하는 주민들은 찍어댔다. 부상자들의 상처는 대부분 칼을 맞은 것 같은 자상이었다. 전경의 폭력에 대항해 주민들은 돌과 화염병을 준비했고 LPG 가스통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부안 읍내에서 촛불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폭력과 분노가 문화로 승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참여하는 촛불집회는 비가오나 눈이오나 매일 열렸다. 태풍이 불 때도 비옷을 입고 사람들은 촛불을 들었다. 학생들은 핵폐기장 반대 상징 그림을 두건으로 치마로 만들어 입고 참여했다. 촛불집회에 참석하는 할머니의 가방 안에는 박스를 몇 개씩 접어서 만든 방석과 쓰다남은 초가 들어있었다. 집회는 연사의 연설만이 아니라 동네 노래자랑 장기자랑의 자리가 되었다. 부안핵폐기장 반대 대책위 집행부는 중요한 논의사항이 있으면 촛불집회에 와서 먼저 알렸다. 촛불집회는 부안의 사람과 정보와 문화가 한자리에 융화되는 자리였던 것이다. 억누르면 저항하고 밟으면 일어서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부안주민들은 폭력을 평화의 문화로 승화시켰다.
민간이 주도한 신규원전 찬반 주민투표, 기장 해수담수화 찬반 주민투표 그리고 지금 추진 중인 당진 석탄화력발전소 찬반 주민투표 등 정부 정책에 대해 주민들이 직접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의사를 확인한 것도 그 시작은 부안이었다. 
부안 주민들은 스스로 선거인명부를 만들어 처음으로 민간주도의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논리대로라면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한 핵폐기장 부지를 백지화하면 끝이다. 인구 6만명의 부안군에서 2~3만명이 참여하는 촛불집회 그 자체로 민심은 당연히 확인된 것이었고 부안주민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시위문화는 전국의 국민들을 감동시켰다. 주민투표를 하는 것 자체가 이런 민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비판이 거셌다. 그런데 부안군민들은 스스로 주민투표를 하겠다고 결정하면서 다시 한 번 새로운 역사를 썼다. 군민들의 의사는 당연히 확인되었지만 제대로 절차를 밟아서 만천하에 보여주겠다는 결정이었다. 마을사람들이 작성한 선거인명부는 뒤에 선관위 자료보다 더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안 주민투표를 계기로 정부는 주민투표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신규원전 입지와 같은 국책사업은 주민투표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라서 민간 주민투표가 계속 되고 있다. 그런데 사법부는 국책사업이라 하더라도 주민투표의 대상이 된다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2003년 부안은 새로운 도전으로 희망을 만들었다. 촛불집회와 주민투표의 시작이었던 부안은 이제 또 어떤 역사를 만들 것인지 여전히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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