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종민 부안독립신문 대표이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이 넘실거릴 설날이 며칠 남지 않았다. 서로 절하면서 복을 받으라고 덕담을 주고받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참 흐뭇해지는 풍경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도대체 그 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말을 하지만, 그 복이 없으면 헛말이 될 것이다. 어딘가에 그 복이 있어야 복을 많이 받으라는 말이 헛말이 아니게 된다.
이런 질문이 낯설다면 그 이유는 이 시대가 서구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신을 생각하는 서구 기독교 계통의 관점에서 보면 복은 무한하다. 무한한 원천인 신이 있으니 그것을 신이 허락하는 만큼 받으면 된다. 그래서 그 양은 아무런 제한이 없다.
하지만 그런 신을 인정하지 않는 동양의 자연사상에서는 복은 무한하지 않다. 어떤 복이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에는 사연이 있다. 그 사연을 알지 못할 때는 ‘은덕(隱德)’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비록 그 원인을 알지 못하지만 누군가 그 복을 준 자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꼭 하나의 원인이 아닐 수도 있다. 여러 시간 여러 사람이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원인이 반드시 있다는 것이다. 복은 반드시 누군가 만들어야 했다. 
복을 짓는다는 말이 있다. 짓는다는 말은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데 복을 짓는다는 말의 뜻은 다른 사람에게 잘 한다는 의미, 혹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복을 짓는다고 한다.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복을 짓는다고 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군가 만드는 복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런 사상은 사회를 바라보는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우리는 앞선 시대의 조상들이 지은 복을 받은 것이고, 우리는 그 공동체에 속한 다른 사람들의 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의 복을 짓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위해서 복을 지으며 또 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있다. 어떤 현인이 만든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온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녀온 천국과 지옥의 겉모습은 아무 차이가 없었다. 사람들은 모두 팔꿈치가 펴진 상태로 굳어져 굽힐 수 없었다. 그런데 천국은 서로 먹여주며 행복해 했고, 지옥은 자기 것을 자기가 먹으려고 애를 쓰면서 괴로워했다”는 이야기다. 복은 이렇게 상대를 위할 때 만들어 진다는 점을 지혜로운 사람들은 파악했다.
이런 지혜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다. 히말라야 어느 동네에서는 자신의 복을 빌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신을 찬양한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물었다. “아니 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신에게 말하지 않고, 신만 찬양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신에게 알려야 하지 않나요?” 그랬더니 조용하게 귓속말로 대답해 줬다고 한다. “신께서 충분히 만족하신다면 이 세상이 신의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러면 나에게도 축복이 올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들도 자신만을 위한 행동 속에서 복이 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또 일본의 어떤 학자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행복한 사람들을 연구한 끝에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그 결론은 바로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가장 좋은 이웃들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이다. 가장 부자인 곳도, 가장 아름다운 곳도, 가장 기후가 좋은 곳도 아니라, 가장 좋은 이웃들이 있는 곳 즉 서로 위하는 이웃들이 있는 곳이 가장 살기 좋은 것이더라는 것이다.
한편, 죄도 짓는다고 한다. 죄도 자기에게 짓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짓는 것이다. 그리고 죄받는다고 한다. 죗값을 받는다고 하고, 벌을 받는다고도 하지만 같은 의미로 죄받는다고 말한다.
좋은 사회는 복을 많이 짓고 받는 사회이고, 나쁜 사회는 벌을 많이 짓고 벌을 많이 받는 사회라는 것을 바로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정리해서 인간의 도덕률을 간단하게 행선(行善)과 불행불선(不行不善)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행선(行善)은 ‘복을 짓는다’는 뜻이고, 불행악(不行惡)은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도 자신이 남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결국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 정해진다는 이치를 농부의 지혜를 빌어 한 말이다.
복에 대해서 이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에 숨어 있는 뜻을 생각하게 됐다. 없는 복을 훔치라는 것이 아니라면, 그 말은 결국 ‘내가 복을 많이 지을게요’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는 말은 아닐까? 자기가 복도 짓지 않으면서 상대더러 무조건 ‘많이 받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헛말이다. 진정 그 인사가 의미가 있으려면, ‘제가 복을 많이 짓겠다’, ‘당신에게 정말 잘 하겠다’라는 의미를 전제해야 한다.
세뱃돈은 약간의 힌트가 된다. 적어도 ‘어른’들은 헛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니들도 복 많이 받아라’하면서 주는 세뱃돈은 그 자체로 일단 눈에 보이는 ‘복’이니까 말이다. 일단 ‘어른’들은 복을 지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복은 진짜 복에 대한 상징일 뿐이다. 진짜 복은 사회에 녹아 들어가 있다. 누군가 미끄러져 다칠까봐 집 앞의 눈을 치우고, 아직 태어나지 않는 후손들을 위해서 국토를 오염시키지 않으려 애를 쓰고, 젊은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추운 광장에서 ‘정의’를 외치는 모든 일들이 이 사회에 큰 복을 짓는 행동이다.
다가오는 새해를 맞아 세뱃돈을 챙기느라 분주할 독자들에게, 새해 덕담거리로 삼아 보시라고 복에 대한 잡설을 담아 보았다. 손주들과 혹은 자녀들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하거든 “그래 그 복 좀 보자꾸나”하고 농을 던지며 얘기를 섞어 보시길 희망한다. 

“부안독립신문 애독자 여러분,
 정유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
 우리 신문도 복 많이 짓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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