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영 전북민주동우회 회장
시장에 상품이 넘쳐나고 온갖 서비스가 늘어갈수록, 세상은 사람 대신 돈이 주인행세를 한다. 몸은 영양과잉으로 비만을 걱정하는데 반하여 정신은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사람이 설 자리가 좁아진다. 풍요 속의 빈곤이다. 그래서 대중들은 허기진 영혼을 달래려고 인문학을 찾는다. 
몇 년 전, 일부 백화점에서 고객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시작한 각종 인문학강좌가 언론기관이나 공익단체로 확산되더니 지금은 각급 지방자치단체까지 나섰다. 지자체들이 너도나도 인문학을 정책으로 내세우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명사초청 강연회, 독서, 각종 강좌 등은 저예산으로 고품격을 얻는 예성비(예산대비 성과비율)가 높은 사업이기 때문이다.
부안군에서도 지난해 부안 정명600주년을 기념하면서 인문도시를 표방하고 나섰다. 타 지역에 비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으나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부안에서만은 타 지역과 달리 ‘보여주기’식 행정을 피하고 군민들의 영혼을 고양시키며 부안군의 위상을 제고하는 등 내실을 기하기 바란다.
군청의 성과를 위한 인문학이 아니고 인문학적 성과를 위한 군정을 펴기 바란다.
인문학의 대중화가 단순히 상위문화를 따라가는 대중의 허영심 만족을 위한 소비가 아니라 진정으로 대중을 위한 인문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문학을 말하면서 군청과 군민을 들먹이는 것이 옹색스럽다. 왜냐면 인문학은 말 그대로 인간에 관한 학문이기에 군정의 틀에 가두는 것은 인문학을 왜소화시키는 행위로 인문학에 대한 불경죄를 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부안군의 인문학은 군청의 인문학이 아닌 부안군민의 인문학이요, 군청에 의한 인문학이 아닌 군민에 의한 인문학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부안군의 인문학이 보편성을 확보해 나라와 민족 그리고 인류를 위한 인문학으로 확대되어야 제대로 군민을 위한 인문학이 된다고 확신한다.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부안군만의 인문학 소재는 차고 넘치도록 많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부안에는 반계 유형원 선생이 있다. 그는 과거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조선사회를 변혁시키고자 평생을 바쳐 사회체제 재정비 방안을 연구하여 <반계수록>이라는 역작을 남겼다. 이로써 반계선생은 조선 실학사상의 시조가 됐다. 반계선생은 32세 되던 해에 부안군 우반동으로 이사와 30년 동안 살며 학문에 정진하다가 이곳에서 타계했다. 반계사상의 산실이었던 부안은 실학의 발상지로서 실학 연구의 본거지가 되어야 마땅하다.
또한 부안에는 매창이라는 걸출한 시인이 있다. 황진이가 치명적인 마력을 가진 ‘팜므 파탈’이라면 매창은 기품 있는 기생이요 인간적으로 성숙한 문인이었다. 그녀와 유희경과의 비련은 차라리 한편의 소설이며, 홍길동을 탄생시킨 시대의 풍운아 허균과의 우정은 매창에게 여느 기생과는 다른 품위를 더했다. 부안은 매창을 우리 문학사에 제대로 자리매김할 의무가 있다.
“서면 백산이요! 앉으면 죽산이다!” 부안은 동학농민전쟁의 1차봉기가 일어난 곳이다. 부안사람들은 동학농민군의 후예로서 동학농민정신을 계승하여 현재도 진행 중인 이 나라의 민주화운동에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만 후손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대표주자는 문학, 역사, 철학, 줄여서 문사철이다. 반계선생은 철학이요, 동학혁명은 역사이며, 매창은 문학이다. 부안의 문사철에는 면면히 흐르는 공통점이 있다. 신분세습을 반대하는 평등주의, 토지의 사유화와 상속을 반대하는 토지공개념,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백성이 골고루 잘 살아야 한다는 민본주의 등을 주창한 반계의 철학이 뿌리가 되어 평등, 민본, 자주의 동학이념으로 줄기가 뻗었다.
앞으로 부안의 인문학을 꽃피울 과제는 부안에 뿌리를 두고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부안군에 인문학전문 대학원대학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이미 사양길로 접어든 4년제 대학이 아닌 석박사과정의 대학원대학이다. 군립대학이든 군민들의 모금을 통한 민립대학이든 상관없다. 이 대학에서 부안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유산과 자연환경을 대상으로 특화된 연구와 창작활동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지자체에서 인문학을 내세우려면 이 정도는 해야 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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