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지도자로 둔갑한 친일 자본가

지난 1일 새로 취임한 현승종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은 취임사에서 “인민재판 형식으로 인촌 김성수 선생을 친일파로 몰고 있다.”며 “인촌 김성수 선생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뚫고 3·1운동의 산실인 보성전문학교(고려대 전신)를 설립했다. 또한 … 민족기업을 만들려고 애썼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김성수를 위시한 <동아일보> 그룹이 일제에 저항한 자신들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례로 꼽는 것이 물산장려운동과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이에 관련한 진실들에 우리는 주목해야만 한다.

흔히 1920년대에 일제의 경제적 수탈정책에 항거하여 벌였던 범국민적 민족경제 자립실천운동으로 알려진 물산장려운동을 살펴보자. 먼저 3·1운동과 관련한 김성수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민간사립학교인 보성학교(보성전문학교와 다름)의 교주 의암 손병희와 교장 윤익선이 3·1의거에 가담했다가 체포·투옥된 사실과 정반대로 김성수는 학교를 살린다는 명목으로 민족적 거사를 외면한 채 2월27일 고향 줄포로 낙향하여 일제와의 정면대립을 교묘하게 피한다.

3·1의거 직후 그는 전국의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으로 생각하고 출자하라"며 자금을 모집, 그해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했다. 당시 그는 3·1의거 직후 고조된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비교적 수월하게 거액의 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결국 3·1의거의 방관자였던 그가 3·1의거의 최대의 수혜자가 되는 기막힌 상황이 전개된 것이다.

한편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교육을 표방하며 당시로선 '재벌총수'로 등장한 인촌은 1922년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먹어라 조선 사람이 만든 것을'이라며 저변에 민족감정을 깐 이 구호를 앞세우고 '물산장려운동'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은 근본적으로는 가동을 앞두고 있는 경성방직의 영업정책에 다름 아니었다.

당시 경성방직의 광목은 생산지만 조선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총독부의 후원과 일본계 은행들의 금융지원으로 도요다 방직기계를 들여왔고, 원사는 오사카의 야기(八木)상회에서 장기계약으로 공급받은 것이었으니 경성방직의 광목은 단지 조선 사람들의 노동력을 빌린 데 불과한 것이었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던 것은 바도 이 때문이었다. 한 언론학자의 말을 빌어보자. “당시 동아일보는 '민족지'를 표방한 채 계열기업의 선전지 역할을 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며 그는 혹평하고 있다.

일제하 그가 민족주의자였는지 어떤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또 하나 있다. 동아일보가 '민족지' 운운하면서 단골로 내세우는 '일장기 말소사건'이다.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대회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모습으로 일장기가 지워진 사진.

1936년 8월10일 손기정의 올림픽 제패를 계기로 8월25일 자 동아일보에 이른바 ‘일장기 말소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동아일보의 사주였던 인촌 김성수는 분개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실을 전화로 연락받은 인촌은 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급히 동아일보사로 오는 자동차 속에서 인촌은 히노마루(일장기) 말소는 몰지각한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노여움과 개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워버리는 데서 오는 쾌(快)와 동아일보가 정간되거나 영영 문을 닫게 되는 데서 나는 실(失)을 생각하여 그 답은 분명했다…"(인촌 김성수전, 동아일보사, 1976)

사장이었던 송진우는 해당 기자들을 불러 '성냥개비로 고루거각을 태워버렸다'며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는 총독부를 찾아가 "회사의 일과는 관계없는 한 기자의 독단에 의한 것"이므로 "정간을 장기간 끌고 가는 총독부 처사는 명분이 없다"는 등의 말로 개인적으로 일으킨 몰지각한 행위였음을 강조하며 선처를 호소했다. 당시 총독부와 밀월관계에 있던 동아일보에 이런 불경스런 사태가 발생했으니 두 사람이 펄펄 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처사였는지도 모른다. 동아일보사는 이길용 기자와 관련자 10여명을 쫓아낸 뒤 다음해 6월2일 속간과 함께 낸 '사고'에서 "지면을 쇄신하고 대일본제국의 언론기관으로서 공정한 사명을 다하여 조선통치의 익찬을 다하려 하오니" 하고 스스로 '일본 언론'임을 서약했다.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사건이 자사만의 것인 양 호도하고 있지만, 동아일보보다 12일 앞선8월 13일자 신문에서 일장기를 지운 사진으로 손기정의 우승을 먼저 보도한 신문은 몽양 여운형이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선중앙일보' 이다.

이 일로 인해 조선중앙일보도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으나 친일을 맹세한 동아일보와는 달리 자금난 등의 이유로 자진폐간하고는 끝내 복간하지 못했다.

김성수는 동아일보를 창간, 경영한 공로로 1962년 박정희 정권 초기 건국훈장 대통령장(2등급)을 받았는데 이 건국훈장의 훈격은 3·1의거 당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국한 류관순 열사의 3등급보다 한 등급 높은 것이었다.

자료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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