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성은 우금산성, 백강은 동진강 하구

   
▲ 이경현 / 부안군청 재무과
작지만 큰절, 부안 상서 개암사는 딱 이런 느낌의 절이다. 고찰(古刹)이라면 한 두 점 당연 있음직한 석탑도 없고 이른 아침 산사(山寺)를 깨우는 묵직한 범종도 없지만, 멀찍이 입구에서부터 큰 팔 벌려 환영하는 일주문과 화려한 팔짝지붕을 자랑하는 대웅전,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웅장한 울금바위는 개암사의 부족함을 메우고도 남아 절의 수려함까지 더해준다.           
잠시 발품을 팔아 울금바위에 올라보면 도처에 산성의 흔적이 흩어져 있고 커다란 바위 곳곳에 여러 개의 굴이 보여 이곳에 왠지 사연 깊은 스토리가 있음직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렇다. 이곳 우금산성은 백제 최후의 항전지인 주류성 유적지이다.
우리는 흔히 백제의 멸망을 660년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에 패하면서 의자왕이 항복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왕이 적들에게 사로잡혔을 뿐 백제의 민중들은 도처에서 백제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역사에서는 이를 백제 부흥운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라의 왕이 사로잡히고 수도가 함락된 상황에서 과연 부흥운동이 쉽게 이루어 질 수 있었을까? 하지만 백제 부흥세력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귀실복신’,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세력은 신라와 당이 점령한 여러 성을 공격하며 이들을 위협하고 왜에 건너가 있던 부여풍(의자왕의 동생)을 왕으로(풍왕) 추대한 후 거점을 주류성으로 옮겨 조직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 우금산성
661년 나당연합군의 위협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 운명에 백제는 긴급히 왜에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당시 왜는 백제를 큰 나라로 표현하며 백제와의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선진문물을 전달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는 왜의 정치, 사회, 문화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는 백제의 구원요청에 왜왕이 직접 진두지휘하며 급히 원군을 파병하게 되는데 그 규모가 나라의 운명을 걸 만큼의 대규모였다. 화살 10만 척, 곡식 종자 3천 석, 피륙 300단에 달하는 원조물자에 1,000여 척의 군선과 4만2천 명의 대규모 병력을 백제 주류성 부근 백강(동진강 하구)에 급파하게 된다. 이에 당나라는 수군 7천명과 군선 170여척을 이곳에 보내게 되는데 663년 8월 이곳 백강에서 역사적인 ‘백강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백강전투’는 대륙(당)과 반도(백제·신라) 그리고 열도(왜)가 모두 참가한 동북아 최초의 해상전투이다. 4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왜는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당에 완패하게 된다. 왜는 전투 경험 부족과 기후와 지형을 철저히 이용한 당수군의 전략에 거의 전멸하다시피 패하게 된다. 이 패배는 결국 백제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 함락으로 이어져 663년 9월 백제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백강전투’의 결과로 한반도 정세는 완전히 당의 지배하게 놓이게 되고 이에 통일신라는 당에 대한 사대주의를 강화한 반면 왜와는 교류를 완전히 단절하게 된다.
   
 

왜는 ‘백강전투’ 완패 이후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문화적으로 부흥기를 맞게 된다. 통일 신라를 방패삼아 외교적, 군사적으로 당의 견제를 막고 멸망한 백제 유민의 대규모 이주로 이들을 통해 문화적 부흥을 이루게 되며, 7년 후 670년에는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며 정치적 전성기에까지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백강전투’에 대한 왜의 트라우마는 신라에 대한 깊은 원한으로 이어져 임진왜란, 일제침략, 그리고 최근의 한·일 갈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민족과 일본과의 뿌리 깊은 반목과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백강전투’는 한·중·일 삼국에 있어 역사적인 의미가 매우 크다. 역사적 가치에 비해 백강전투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으나 중국과 일본에서는 ‘백촌강전투’, ‘백강구전투’로 불리우며 그 의미를 크게 부여하고 있고 최근 우리 학계에서도 이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재조명의 과정에서 최근 주류성과 백강의 위치에 대한 논쟁이 학계에서 뜨겁게 진행 중이다.
주류성에 대한 위치 논쟁이 진행되는 곳은 부안 우금산성, 홍성 학산산성, 서천 건지산성, 연기 당산성이고, 백강의 위치는 동진강 하구라는 주장과 금강 하구라는 주장이 대립 중이다
분명한 건 백강의 위치에 따라 혹은 주류성의 위치에 따라 백강과 주류성의 위치가 명확해 진다는 점이다. 백강이 동진강 하구이면 주류성의 위치 역시 상서 우금산성일 가능성이 크고 백강이 금강하류 이면 주류성 역시 충남의 어느 곳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각 주장에 대한 논리적 근거는 분명 있지만, 역사적 자료와 당시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주류성과 백강은 부안지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를 보면 주류성은 ‘농사짓는 땅과는 거리가 멀고 돌이 많고 척박하여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성이면서, 동시에 방어하기는 쉽고 공격하기는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표현처럼 부안 상서 우금산성은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변산 반도에 위치해 있어 적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고 유사시 산속으로 도피할 수도 있어 부흥세력에게 최적의 지리적 요건을 제공하고 있다.
   
▲ 백제의 마지막 항전이었던 백강전투는 대륙(당)과 반도(백제·신라) 그리고 열도(왜)가 모두 참가한 동북아 최초의 해상전투이다. 4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왜는 압도적인 숫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당에 완패한다. 사진은 백강전투 위치도.
또한 이곳은 계화도 간척사업이 시행되기 전까지만 해도 토지가 척박하여 농사짓기가 매우 어려운 지역이었고, 이에 백제 부흥군 지도부는 본거지를 인근 평야지대로 옮기려 시도한 기록도 있는데 인근 평야지대는 바로 지금의 김제평야였던 것이다.
또한 현 동진강과 만경강을 끼고 발달한 지역에 백강의 ‘白’으로 시작되는 지명이 유독 많음을 알 수 있고 (김제 백산면, 부안 백산면, 백석면, 백구면 등) 우금산성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개암죽염 앞으로 펼쳐진 작은 평야가 보이는데, 사료에 나와 있진 않지만, 이 평야를 ‘장패뜰’(장수가 패한 벌판)이라며 예로부터 구전되어 오는 지명이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백강은 동진강이고 주류성은 부안일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백강의 다른 이름인 ‘기벌포(伎伐浦)’는 지금의 동진강 하구 해상의 ‘계화도(界火島)’ 및 부안읍의 백제 지명인 ‘개화(皆火)’와 고음(古音)이 상통하고 ‘삼국사기’, ‘당서’ 등 역사서에도 우금산성과 부흥세력과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걸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주류성에 대한 우금산성설(說)과 백강에 대한 동진강 하구설(說)이 명확한 자료로 존재함에도 이에 대한 논쟁을 타 지역에 빼앗기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2014년부터 부여군에서는 백강이 금강임을 전제로 백강전투에 대한 한중일대표단이 참석하는 합동위령제를 개최하고 있고, 주류성의 위치를 주장하는 각 지역에서도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최근 부안에서도 주류성에 대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이에 대한 관심을 모으는 노력이 진행 중이고 정명 600주년을 맞이하여 부안군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노력도 병행 중이다.
더 늦기 전에 방치되어 가는 우금산성과 잊혀져가는 백강전투에 대한 군민의 관심을 모으고 유구한 부안의 역사를 되찾는 노력을 기울여 보자. 올해가 부안 정명600주년의 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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