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를 벗어나 쇠뿔바위 밑 청림마을로 들어가 마당에 잔디와 꽃을 심고 텃밭에 과채류를 가꾼 지 5년이 되었다. 며칠 전 우연히 이곳으로 처음 이사 왔을 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메모를 발견하곤 얼마 전까지 울안에 예쁘게 피어있던 ‘자란’이 떠올랐다.
어제 저녁 운동 삼아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컴컴한 대문 앞에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 조심스럽게 놓인 ‘자란’을 발견했다. 자란은 꽃망울을 막 터트리려 준비하고 있었다.
사연일랑 이렇다. 지난 일요일 옆집 할아버지(옆집, 앞집, 뒷집, 건넛집 모두가 할머니, 할아버지라 아내와 얘기를 나눌 때도 누구를 가리키는지 헛갈린다) 가 절 부릅니다.
"밭에는 뭐 좀 심었는가?"
"아! 예... 고추도 심고, 파도 심고... 헤헤헤..."
"내가 자란하나 줄께 건너와"
익산에서 교직생활을 마치고 쇠뿔바위가 있는 우리 마을 뒷산에 등산을 자주 오시다가 마을이 너무 맘에 들어 아예 들어와 사신지가 10년...
마당 텃밭에 온갖 것을 다 심으시고 없는 꽃이 없어 보인다. 할머니 자랑으로는 귀한 야생화들은 그것을 구하기 위해 장거리 출장도 마다않고 부지런히 다니셔서 지금의 이런 꽃밭을 일구었단다. 결코 세상에 공짜는 없고 자기가 가진  좋은 것을 하나 주어야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겨우 하나 얻어 올 수 있다고 하신다. 할아버지가 주시겠다는 자란도 제주도 사는 딸이 귀하게 얻어서 가져와서 몇 년을 키워 이제야 꽃이 피었다고 자랑이시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알고 지내는 형님의 마당에는 흔하게 많이 피어있는 것을 보고 약간 실망도...)
할머니가 그렇게 귀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할아버지는 결재도 안 받고 두어 개 주겠다고 절 오라고 하고 삽을 찾으니 할머니는 깜짝 놀라며 안 된다고 펄쩍하신다.
할아버지와 나, 그리고 날 따라온 집사람까지 모두 분위기가 쏴~ 허니 썰렁하다. 할머니께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하고 급히 수습에 나선다.
"자란은 안 되고 내가 예쁜 철쭉 분재를 하나 줄게. 이게 근상이란 건데 이것도 귀한거야"
분위기 반전이 안 되자 할머니는 또 한 가지를 제안한다.
"철쭉이 맘에 안 들면 그럼 이 묵은 할미꽃을 줄께. 크고 묵은 놈은 그래도 비싼 거야."
"할미꽃은 직근이라 뿌리가 깊이 박혀있는 거야. 여보, 곡괭이 좀 가져와봐."
할아버지는 마지못해 곡괭이를 가져다가 할미꽃을 캐기 시작한다. 깊은 뿌리까지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하면서도 거침이 없으시다. 역시 내공이 느껴진다.
"찢어서 나눠 심어"
할아버지께서 삽질 임무를 마치시더니 조용히 그리고 재빠르게 옆에 있는 자란 하나를 얼른 하나 삽으로 뜨신다. 할머니가 또 한 번 언성을 높이신다. "안된다니까 저 양반 봐!"
이미 손에 들고 계시던 것을 제게 넘겨주셔버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가져올 수가 있겠는가? 난 극구사양 했지만 할아버지를 이길 수가 없었다. 말라버린 개울을 사이에 둔 두 집은 대문으로 다니질 않고 개울을 건너다닌다.
집으로 돌아오는 데 할아버지께서 "다음에 또 좋은 것 있으면 집 앞에 던져 놓을게 잘 심어봐."
집에 돌아와 보기 싫다고 잘라버린 사철나무의 뿌리를 곡괭이로 캐내고 화단을 정리하고 정성들여 심었다.
어젯밤 어둠속에서 자칫 밟아버릴 뻔한 "자란"이 할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 하던 그녀석이다. 할아버지는 한 개만 준 것이 못내 서운했는지 두 개를 더 캐서 검정봉투에 담아 할머니 몰래 우리 집 대문 앞에 놓고 가신 것이다.
결국 소리 없이 강한 할아버지가 소리 없이 이겼다. 할머니가 나중에 우리 집 놀러오면 뭐라 말하지? 길에서 주었다고 할까? 아는 형님 집에서 얻어왔다고 할까?
오늘 새벽에 자란을 심으면서 참 행복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딴청을 피우는 할아버지를 상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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