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가고 싶어. 도자기는 쓰임새가 정해져있으니까 모양도 비슷할 수밖에 없잖아.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조형예술을 배우고 싶어”
사실 공동체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농사를 지어야 하고, 식구들과 함께 살아가야하고, 자급자족을 꿈꿔야 한다는 말들이 피곤하기만 했다. 졸업하고 식구로 남아있기로 결심한 이유도 기억나지 않았다. 왜 벗어나고 싶은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지원해주기 힘들다는 부모님이랑 싸우는 동안 공동체를 떠나는 이유는 ‘책으로 알게 되는 간접경험 말고 도시의 비인간적인 현실세계를 직접 경험’ 하기 위한 것이 되었다. 집세와 생활비를 백만 원쯤 빌려서 나는 서울로 왔다.
일자리를 구한다는 게  나는 스마트폰으로 알바천국이나 뒤지는 것밖에 몰랐다. 직종, 근무시간, 출퇴근 거리 시급을 원하는 조건에서 구하자니 이 주일쯤 걸렸다. 처음 면접 보러 간 곳은 이력서를 써오라했다. 스펙을 적어내야 하는데 나는 검정고시 딸랑 한줄 적었다. 공동체에서 지낸 경험은 둘째 치고 대안학교라고 해도 면접관이 모를 것 같았다. 내 이력서를 보더니 언니가 한마디 했다.
“니 경험을 다른 사람들 기준에 맞추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럼 왜 굳이 널 뽑겠어. 니 경험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야지”
끙끙거리며 쓰고 여기저기 면접을 봤지만 일하게 된 곳은 이력서 없이 면접 보러 간 24시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주 오일, 아침 아홉 시부터 세 시까지 점심식사 없이 여섯 시간을 일하고 시급 육천오백 원을 받기로 했다. 출근하면 매일 청소부터 하고 열 시부터 손님을 받았다. 백 평정도인 매장의 테이블, 의자, 바닥을 닦고 닦았다.
처음 이 주 동안 음료 만드는 법을 몰랐다. 주문 들어올 때마다 눈치껏 했다가 틀리면 욕만 얻어먹었다. 원래 그러나 보다 하고 대강 외워 가는데 어느 날 호텔조리학과에서 인턴이 나왔다. 나랑 동갑인 세 명이었는데 얘네들한테 첫날부터 레시피를 외워오라고 종이를 줬다. 나는 넷째 주가 되어서야 레시피를 받았는데 그게 좀, 서러웠다.
하루는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계산대에 손님이 주문하는 음료버튼을 찾아서 누르는데 집중해야했다. 퇴근하고 가만 생각해보니 손님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꼭 자판기가 된 것 같았다.
카페알바녀가 되기 전에 친구를 만나면 으레 밥 먹고 카페에 갔다. 이제 그 놈의 쾌적함을 위해 얼마나 버리고, 닦고, 씻어내야 하는지를 알고 나니 카페가 편안하지 않다. 요거트 스무디에는 요거트가 들어가지 않는다. 요거트 맛이 나는 파우더 세 스푼, 시럽 두 번 꾹꾹 짜내고 얼음 한 스쿱을 넣어서 믹서에 갈면 된다는 것을 알고, 내가 판 음료가 음식인가 조립된 상품인가 고민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카페에서 딱 한 달만 일하고 그만뒀다. 일주일 전에 말했는데 점장은 아무 문제없이 다음 사람을 구했다. 나는 이 카페의 가장 자주 교체되는 부속품 중에 하나였다.
새로운 일을 구해놓고 공동체에 잠시 내려왔다. 사람들을 만나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낯설었다. 그 뒤로 거의 격주로 변산에 내려왔다. 나를 둘러싼 초록이파리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밭에서 흙을 밟고 땀을 흘리는 게 신났다. 비 오는 날도 흐르는 빗물이 더럽지 않으니 슬리퍼만 신고 물웅덩이를 밟아도 되는 게, 살 것 같았다. 식구나 학생으로 살다가 손님으로 들렀던 사람 중에 나만큼 아쉬워한 사람은 못 본 것 같다. 새벽에 부안 가는 첫 차를 타면서 설레고 부안에서 나오는 가장 늦은 차를 타면서 우울해질 정도로 말이다.
다음에 일한 곳은 작은 수제맥주집의 주방이었다. 주말만 일하는 대신 하루에 열한 시간을 일했다. 가게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요리메뉴에 신경을 쓰는 집이라 이것저것 배울 것이 있었다. 직원들이 먹는 것도 셰프가 매일 장을 봐와서 만들어 줬다.
보통 출근해서 전날 주문한 야채를 얼음물에 담가 되살리고 메뉴재료들을 다듬는 것으로 일을 시작한다. 카페에서 요거트 파우더를 넣었던 것과 다르게 레몬즙을 직접 짜내 소스를 만드는데, 적어도 내가 음식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어느 날은 주문받은 샐러드를 내고 주방 안에서 손님이 먹는 모습을 지켜봤다. 저 사람은 지금 입에 넣고 있는 걸 내손으로 만들었다는 걸 모를 것이다. 어느 땅에서 어느 농부가 길러낸 상추며 누가 만들어낸 치즈, 누가 구운 빵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에! 일 년 내내 빨간 방울토마토를 먹을 수 있다는 게 그렇게 당연한가?’
나도 만찬가지였다. 월급을 받으면 돈을 내는 소비자가 되었다.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나는 계속 샀다. 음식, 화장품, 옷, 생활용품. 집세랑 공과금이랑 휴대폰비용만 남으면 다시 월급날만 기다리고 일한다. 그 동안 지갑을 유혹하는 광고로 도배된 세상은 자꾸 날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 통장만 챙기게 되었다.
같은 집에 사는 네 살배기 여자아이가 밤에 엄마를 찾으며 울어대는 것이나, 다른 언니가 설거지를 쌓아 놓는 게 전에 없이 성가시고 화가 났다. 내가 책임져야할 게 내 몸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공동체에 벼라별 사람들과 같이 살았던 게 불가사의하게 여겨졌다.
결국 나는 나간 지 네 달 만에 다시 짐 싸들고 돌아왔다. 충분했다고 말할 자신, 없다. 나는 신문에서 읽던 도시 하층민의 빈곤, 집 없는 자의 설움, 비정규직의 살벌함을 내 삶 깊숙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언니는 “너는 꼭 도시를 체험하러 온 사람 같아. 니가 배운 대로 정말 도시는 그런 곳인가, 하고” 라고 말했다. 학교를 다니고 공부를 했으면 달랐을까? 클럽죽순이가 되거나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도시생활에 푹 빠져서 이렇게 빨리 돌아올 수는 없었을까?
그러나 정작 나를 가장 숨 막히게 한 건 매일 출퇴근하는 내내, 끊임없이 들려오는 기계소리를 벗어나려면 이어폰을 귀에 꽂아야 하는 생활이었다. 에어컨 때문에 더울 새가 없는 여름이 징그러웠다. 가지치기 당하지 않은 나무, 맨 흙, 지는 해와 뜨는 달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