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끝났다. 잡음도 있었고 곡절도 많았다. 언제는 안 그랬는가마는 이번 20대 총선처럼 ‘선거판 개판’이라는 말이 어울린 적도 없지 않나 싶다.
공천부터 시끄러웠다. 더불어민주당은 공천심사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이유로 현역 의원을 배제해 경선 자체를 무산시켰고, 국민의당 역시 공심위 심사 결과를 뒤엎고 규정에도 없는 패자부활전을 치렀다. 당헌 당규에 의해 운영되는 공당이라고 하기엔, 직접 겪었으니 망정이지, 믿기지 않는 행태였다. “오로지 국민만 보고 간다”는 그들의 약속이 허언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는 망발이었다.
선거 중반에는 김종회 후보의 방송 토론회 불참 문제로 후보들 간에 설전이 오갔고, 막판에는 김춘진 후보에 대한 폭행사건이 터지면서 후보자가 목보호대에 깁스까지 하고 나다녔다. 거의 같은 시기에 한 후보 측에서 음식물 제공 의혹까지 불거져 현재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이다. 그 뿐인가. 중앙정치권을 중심으로 일방통행을 일삼던 세력들이 무릎을 꿇은 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천연덕스레 연출하던 시기, 지역정치권에선 전·현직 기초의원들이 자신의 장래를 도모하기 위해 유력 후보 앞에 나래비로 줄을 섰다. 저쪽에선 소지역주의를 비판하면서 이쪽으로 넘어오면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행태를 서슴지 않았고, 후보의 정체성과는 상관없이 그저 연고에 따라 사활을 거는 극렬 지지자도 상당수였다.
내 편은 선이고 네 편은 악이었다. 지역은 갈래갈래 찢어지고 사람 관계는 너덜너덜 헤어졌다. 누군가를 제대로 알려면 함께 여행을 해보라고 했는데, 함께 선거판을 겪어보는 쪽이 더 빠르고 정확하지 싶다.
아무려나 선거는 끝났다. 그래서 이긴 누구는 금배지를 달게 됐고, 진 누구는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지거나 올곡한 복수심으로 4년 후를 벼릴 것이다. 하지만 상처가 깊어 걱정도 사뭇 깊다.
흔한 정치 슬로건인 ‘주민 화합’을 주문하기 위해 이처럼 긴 사설을 늘어놓은 것은 아니다.  선거가 끝난 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니 앞으로 이런 부질없는 갈등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좀 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 이번 20대 총선을 지켜보면서 ‘선거를 통한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분명하게 목도했기 때문이다.
정치인은 기본적으로 분열에 의지해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선거판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한 형국으로 찢어놓느냐는 곧 정치력이요, 전략·전술이다. 정치를 통해 변화를 꿈꾸는 유권자들에게 돌아오는 것이 언제나 ‘불화(不和)’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니 선거를 통해 배출한 지역 대표가 사실은 지역 여론을 대표하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제는 유권자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까 지역이 지역 스스로의 목소리를 내는, 진정한 주민자치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먼저 지역의 이슈를 두고 토론회든 공청회든 설명회든 다양한 대화의 장이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역주민 스스로 현안에 대해 치열한 논의를 벌이는 것이다. 국회의원과 시장·군수 등 유권자의 주권 행사를 통해 선출된 공복들을 참석시키면 더 좋다. 그 과정에서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남발하며 주민을 미혹했던 얼치기들은 걸러질 것이다. 그들의 휘발성 높은 비젼과 궤변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다. 진짜와 가짜가 구별되고 옥석이 드러난다. 권력자에 대한 불온으로 금기시되던 현안들이 보통사람들 입에 예사롭게 오르내리게 된다.
이런 제련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지역 주민에게 진짜 이익이 되는 정책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일테면 정치인이고 주민이고 너나없이 목을 매는 새만금 개발이 정말 주민들에게 골고루 이익이 돌아가는 사업인지, 아니면 업자 배만 불리고 시민들은 빈 손가락만 빠는 사업인지 차근차근 짚어볼 수 있다. 널찍한 도로를 뚫고 공원을 조성하는 사업도 마찬가지다. 반대로 그런 토목사업보다 연금 인상을 비롯해 학비 지원, 의료비나 공과금 감면 혜택 등 소소한 복지정책이 훨씬 적은 예산으로 주민들의 주머니 형편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도 있다. 판단 기준은 주민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되느냐, 오로지 그 것이다.
그렇게 주민들 스스로 결론을 도출하고 나면, 주권자의 권위를 발동해 손수 뽑은 정치인들을 압박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다. 그가 진정으로 지역을 위해, 그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국정을 이끌 수 있도록 귀가 따가울 정도로 주문하고 간섭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주민자치는 어쩌면 주인된 자의 당연한 의무이다. 머슴을 뽑아놓고 백지수표를 쥐어주던 어리석은 짓은 여태까지 넘칠 만큼 하지 않았던가.
토론의 미덕은 이 뿐만이 아니다. 지역 내 이슈를 테이블에 올리고 협상과 타협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겠으나, 진짜 매력은 따로 있다. 토론석상에 참가하거나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는 점이다. 현안에 관한 모든 변수가 튀어나오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모호했던 논리를 퍼즐 맞추듯 조금씩 완성해 나갈 수도 있다. 말하자면 토론회가 참가자의 이념적 위치를 파악해주는 정치적 내비게이션 노릇을 할 수도 있다. 토론이 곧 학습이자 공감의 장이 되는 셈이다.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제안이지만, 이렇게라도 한발 내딛지 않으면 선거철의 혼란과 선거 후의 갈등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뽑기 전에 걱정하고 뽑아 놓고 걱정하고, 유권자의 스트레스 지수는 높아만 가는데, 우리 정치풍토는 정책보다 맷집으로 승부하는 이들이 독점하는 쪽으로 최적화되어 가고 있으니, 더 험한 꼴 당하기 전에 우리도 한번 꿈틀거려 보자, 이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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