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잘 사는 것(well being)에 관심을 갖는 게 당연한 것처럼, 잘 죽는 것(well dying)에도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통증과 질병을 완전하게 피하고 살 수는 없다. 내 삶에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그렇듯이 내 삶의 완성이 되는 죽음에 대해서도 진지하고 엄숙한 질문을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웰다잉법’이라 불리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 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되었다. 아직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관련단체들과의 협의가 이루어진 상태여서, 호스피스제도 보완기간을 감안해 2018년부터는 시행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연명치료란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으로 임종기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말한다. 이 법은 회생 가능성이 없을 경우 심폐소생술 같은 연명치료를 받지 않을 수 있게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연명치료를 중단하더라도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행위와 영양분 및 물, 산소 공급은 지속하도록 했다. 우리나라에선 말기암으로 판정받은 사람의 97%가 항암치료를 받고, 호스피스 치료보다 5배 많은 비용을 치르면서 병상에서 항암제를 투여 받고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생을 마감한다. 우리나라는 매년 26만여 명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단 2%만이 호스피스, 완화의료 서비스를 이용한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소가 세계 40여 개 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죽음의 질’ 조사에서 한국은 최하위 권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법률의 통과는 환자나 보호자가 원할 경우 연명치료를 중단할 수도 있다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다는 뜻이지, 모든 회생불가능한 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안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의식이 있을 때 죽음에 대해서도 미리 생각해 놓을 필요가 있다.
버킷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그밖에도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의료진이나 가족들의 걱정과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영화들이 꽤 있다. 반대로,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는 책을 보면 한 젊은 피폭 환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환자의 부인이 사랑하는 남편을 하루라도 더 옆에 있게 하고 싶어서, 자신이 방사선에 노출이 되는 상황에서도 연명치료를 하면서 죽음의 순간까지 환자의 곁을 지킨다.
이렇게 환자나 환자의 가족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태도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환자의 가족들은 환자의 죽음이 다가오게 되면, 아무런 생각을 못하고 의사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많다. 의사들도 회생불가능한 환자의 임종을 대하는 태도는 각자 다르다. 질병과 건강에 대한 가치판단도 그렇지만,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의학 교과서에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죽음을 의사의 결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나의 경우에는 이런 죽음을 생각해본다. 의료기기 소리와 알람이 울리는 중환자실 침대가 아니라, 내가 익숙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너와 함께여서 삶이 참 행복했다. 나랑 함께 해줘서 고마워”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직면해서 삶을 보아야 실존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죽음을 생각해보는 것이 삶을 건강하게 바라보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참고로 존엄사는 다른 개념이다. 서구 몇 나라와 미국의 몇 몇 주에서 시행되는데, 회생불가능한 환자가 삶을 종료하고 싶을 때 환자에게 약을 투약해서 자살을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은 존엄사와는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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