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세모(歲暮)를 사랑하는 딸들과 일본에서 보냈습니다.
2015년의 시작을 알리는 자정이 되자, TV에 당시 우리가 묵고 있던 나가사키가 나오더니 큰 나무가 서있는 신사(神社)를 배경으로 어린아이들이 손을 잡고 부르는 희망의 노래가 울려 퍼집니다. 배경이 되었던 나무가 있는 곳이 나가사키 진자신사(山王神社)입니다. 1945년 8월 9일, 10만 명이 사망을 한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에 살아남은 나무가 있는 곳입니다.
새해 첫 아침에 신사를 찾았습니다. 동네 뒷동산에 위치한 조그마한 신사에는 아름드리 나무  두 그루가 서있습니다. 제법 많은 일본인들이 새해 복을 빌기 위하여 들리고 있었습니다.
원폭 이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75년 동안 풀 한포기 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늦여름 비가 내리자 폐허가 된 땅에서는 새싹이 돋아났습니다. 공포와 절망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폐허의 잔해 속 초토화된 땅에서 파랗게 싹이 트는 것을 보면서 안도감과 희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초록의 생명’, 곧 자연은 하나의 희망의 끈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1966년 도카이무라 핵발전소를 시작으로 핵발전국가에 들어서게 됩니다. ‘핵의 이중성(二重性)’입니다. 일본은 ‘핵무기 금지’와 ‘영구 평화’를 주장하면서 비극의 희생자만을 부각시킬 뿐, 식민지 지배와 전쟁의 가해자로서의 진정성 있는 사과는커녕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기에만 급급했습니다.
핵에 의한 사고로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을 경험한 몇 나라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핵발전소 사고와 핵폭탄 투하를 경험한 나라는 일본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는 핵폭탄 투하로 부서진 건물과 잔해를 남겨두고 평화박물관으로 운영하면서 후세에게 핵의 위험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까지입니다.
단 2개의 폭탄으로 20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전대미문의 참사를 겪은 일본은 이중 20% 이상인 조선인 희생자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 천왕의 항복 선언에는 핵폭탄에 의한 일본의 희생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미국의 반인류적인 핵무기 사용에 대한 언급도, 태평양전쟁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와 책임은 뒷전이었습니다.
1988년 히로히토 천왕의 사망 직전 나가사키 시장 모토시마는 ‘일본 천왕에게 전쟁의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극우단체가 몰려들어 시장의 사퇴와 사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고, 결국 이듬해 천왕의 사망 직후 모토시마 시장은 한 극우주의자의 총에 목숨을 잃을 뻔 했습니다.

전후 70년, 2015년 일본의 풍경입니다. 아베 정권은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법안을 밀어붙이기로 통과시켜 제국 일본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평화헌법이 다시 유린당하고 있습니다.
과거 무력을 통한 제국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이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극으로 귀결되었다면, 경제 대국으로의 제국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로 귀결되었습니다. 기가 막히는 것은 여전히 과거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반성 없이 예전 방식을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종말적 재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은 후쿠시마 사태의 해결을 위한 노력보다는 세계를 속여가면서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고, 안보법을 밀어붙이는 등 쇼비니즘(Chauvinism)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국은 어떠합니까? 얼마 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한일협상으로 국민의 분노가 하늘을 찌릅니다. 恥(치). 중국인들은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은 상대에게 필담으로 이 한자를 남긴다고 하지요. 한문으로 부끄러워하다는 뜻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2016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올해 저의 화두는 ‘평화’입니다. 한국도 일본도, 안으로 제 백성을 평화로 다스리고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백남기 농민이 누워 계시는 서울대병원에도, 제주 강정에도, 밀양에도, 세월호 유가족에게도, 쌍용자동차와 용산 참사 가족에게도 평화가 깃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