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아이콘이자 가장 성공한 경영자중의 한 명인 애플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는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 병상에서 생명유지 장치에 기대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동안 우리들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남겼다.
“...... 평생 동안 내가 이룩한 부는 도저히 가져갈 수가 없구나.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행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스티브 잡스의 병상에서 보낸 마지막 당부처럼 우리는 추억의 저금통장에 사랑으로 다져진 추억을 차곡차곡 잘 쌓아가고 있는지 되돌아 봐야 하지 않을까?

사랑으로 푹 절여진 추억을 가득 안고 ‘내 고향 창수동’으로 돌아와 또 한편의 추억을 만들어 가고 있는 노부부를 만나러 우슬재 너머 창수동으로 향했다.
창수동은 내변산 방향으로 우슬재 고개를 넘어 내려오자마자 왼편에 있는 가는골 저수지를 끼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 청림, 노적, 거석, 중계, 사자동을 일컫는 안 산중 사람들이 상서면사무소에 가거나 부안에 가려면 창수재를 넘어 내동, 동림 마을을 지나야만 했다. 예전에도 큰 마을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오늘의 주인공 김재철(77),이경숙(76)부부를 포함한 세가구만이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해서 아이 낳고 살다가 큰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전주로 이사를 하고, 그 곳에서 꽤 잘되는 식당을 인수해서 큰돈도 벌었고, 더 큰 욕심을 내다 실패도 해보고 했지……. 돌고 돌아 내 고향 창수동으로 돌아온 것은 7년 정도 된 것 같아. 예전엔 이곳을 창수동 자전차집으로 불렀는데 안 산중에 사는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와서 우리 집에 맡겨두고 걸어서 창수재를 넘어 학교엘 다녔거든…….”
자그마한 체구이지만 구릿빛 피부와 함께 건강함과 다부짐이 묻어나는 김재철씨가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한다.

내변산 청림의 유명한 ‘감’이야기부터 듣고 싶었다.
“예전부터 청림을 비롯한 내변산은 먹시감이 아주 많았지. 당시에는 과일이 매우 귀하던 시절이라 사과나 배 같은 것은 명절에나 먹을 수 있었고 지금처럼 수입과일은 생각하지도 못했으니 먹시감의 인기가 아주 좋아 전국에서 감을 사러 청림으로 들어왔지. 감나무에 열린 감을 상인들에게 통째로 팔기도 하고 직접 따서 뜨거운 물로 우려서 우린감으로 팔면 없어서 못 팔 지경이었어. 그때는 내가 하루에 스무 접의 감을 따고 우리고, 따고 우리고 그랬어…….”

“지금은 부안 장에 우린감을 내놓는 집이 우리밖에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인지 몇 년 전부터는 대봉시보다도 훨씬 시세가 좋아. 정확히 말하면 먹시감이 시세가 좋은 게 아니라 대봉시라는 녀석이 너무나도 많이 나오고 수입과일 쏟아지고 하니까 폭락을 한 것이지. 올해 대봉시 열 접을 시장에 내 놓았는데 10만원밖에 안주더라고. 어찌나 부아가 나는지 원~”

“산중에 사셔도 그렇게 없이 살지는 않았나 봐요? 전주에 집도 사고 가게도 열고…….”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벌레 먹은 콩을 고르고 있는 뽀얀 피부의 이경숙씨(76)가 호호호 웃으시며 말을 꺼낸다.
“줄포 목상리가 친정인데 거기는 쌀농사를 많이 짓는 들판이라 보리밥을 먹고 살지는 않았어요. 산중이라는 말의 뜻도 이해를 못하고 시집와서 첫날밤을 지내고 아침에 마당을 나와 보니 산중이 왜 산중인가를 알겠더라고요. 빙 둘러 산밖에 안보이니까……. 그런데 쌀 한 톨이 안 들어간 꽁보리밥만 먹는 거예요. 난 상관없지만 가마솥 뚜껑을 열 때마다 내 새끼들 입속에 꽁보리밥만 먹일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속상하고 맘이 아픈지 눈물깨나 흘렸지요.”
“하마터면 다른 데로 시집을 갈 뻔 한 것을 어찌어찌 인연으로 산중으로 시집왔어도 남편이 ‘여자는 참 불쌍허다’고 하면서 참 잘해줬어요. 또 워낙 부지런하고 성실하니까…….”
이경숙씨가 시집을 온 뒤부터 살림이 피고 모든 일이 잘된다고 시부모로부터 복덩이 소리를 들으며 귀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행복한 세상도 자기가 만들고 불행한 세상도 자기가 만드는 법이지요. 난 시집와서 여직까지 돈 귀한 줄 모르고 살았어요. 그러니 얼마나 좋아요?”
큰 부자도 더 큰 부자가 되고픈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찌 부족함이 없었으랴, 단지 욕심이 없었을 뿐이겠지.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는 이경숙씨의 종교관과도 관련이 깊은 듯하다.
막내아들을 출산할 무렵 병이 위중하여 아기와 산모 중 선택을 해야 한다는 의사선고가 떨어졌다. 아기를 살리기로 맘을 먹고 산모는 죽어도 좋다는 서약을 하고 당시에는 흔치 않았던 제왕절개수술을 했고 결국 수술 도중 큰 혈관이 잘려 수술실 바닥에 도랑물처럼 피가 흘렀다. 겨우 목숨은 건졌으나 병원에서도 포기를 한 그녀의 삶은 살아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을 움직일 힘도 없고 수시로 추운 기운에 온몸이 떨렸다. 마지막으로 모든 치료와 약을 끊고 오로지 하나님께 매달렸다. 기도를 들으셨을까? 믿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든 약을 끊은 그 후부터 오히려 건강이 차츰 회복된 것이다. 꺼져가던 생명을 다시 얻은 이후엔 모든 일이 감사할 따름이며 고된 일을 할 때도 찬송가가 절로 나왔다. 이경숙씨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를 빠지지 않고 청림에 있는 교회로 새벽예배를 간다. 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눈이 많이 내리면 걸어서라도 꼭 간다. 새벽에 올리는 기도 시간은 기쁘고 즐겁고 평화로워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교회에 다니는 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가면 등록금에 보태라고 적지 않은 돈을 선뜻 주시곤 한다고 귀띔해준 분이 있어 직접 그 사연을 물어보니 절대 그런 일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노인 두 분이 하는 감농사, 콩농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그런 돈으로 남과 나눈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소소한 일상에 만족할 줄 알고 또한 이웃과 나눌 줄 아는 지혜로운 삶을 이어가는 노부부를 보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의 실마리를 찾은 것인가? 산길을 내려오는 길은 정겹고 발걸음 또한 가벼웠다.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