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간에 으그덕거리지 말고
살아야 혀. 살믄 을매나 산다고
서로 사이좋게 살믄 좀 좋아


남산떡은 엄청 손이 빠르다. 새벽에 일어나 들깨를 베어 놓고 출근을 했다가 오후 4시에 퇴근을 하면 집에 들를 새도 없이 곧바로 밭으로 달려가 고구마를 캐고 양파를 심는다.
7마지기 밭을 놀리지 않고 두 번 이상의 작물을 심는다. 그러니 쉬는 날이 거의 없다.
올해로 65세, 남산떡의 일생은 대부분의 그 세대 어르신들이 그렇듯이 일과 고생으로 가득차 있다.
남산떡 손몽순 여사의 원래 고향은 전남 곡성이다. 열일곱 살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이팔청춘 꽃다운 나이에 광주 전남방직회사에 취직을 하여 스물두 살까지 천을 짜고 재봉을 돌렸다. 그러다가 서울로 일터를 옮겨 진로회사를 다녔다.
돈을 모으려고 계를 부었는데 탈 차례가 되어 계주가 도망을 가버렸다. 도망간 계주를 찾아다니다 못찾고 떡장사를 하기도 했다. 영등포에서 떡을 떼어다가 동작동 국립묘지 앞에서 팔았다.
강퍅한 도시생활에 지쳐갈 무렵 친구의 소개로 정읍 사는 조재수씨와 결혼한 것이 스물 다섯 살이었다. 2년을 살고 막내 시누의 소개로 부안 하서 계곡마을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첫해 농사를 지었는데 노풍벼를 심었다가 쫄딱 망해버렸다.
병충해를 이기지 못하고 벼가 몽땅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렇게 농사에 몇 번 실패하자 빚이 쌀 250가마까지 늘어났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66만원을 주고 암송아지를 사서 일소를 만들어 논밭을 갈고 인근의 밭을 얻어 고구마를 심었다. 고구마 농사를 1만 여평 가까이 짓기도 했다.
처음에는 10만원짜리 적금을 들고 다음은 20만원짜리 그 다음은 30만원짜리, 100만원짜리 적금으로 키워 나갔다. 빚을 모두 갚는데는 10여년이 걸렸다.
전답도 장만했다. 쌀 열여덟짝을 주고 집을 사고 밭을 사고 논도 샀다.
살림이 늘어나는데 재미가 붙을 즈음에 신랑이 갑자기 급성 간암으로 어린 아이들과 농사를 남겨두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신랑 나이 55세였다.
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근처에서 벌어진 도로공사 함바집에서 일을 시작했다. 격포에 있는 횟집에도 다녔다. 무주에 있는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일하기도 했다. 동네사람이 잡아준 뱀을 광주에 가져다 팔기도 했다.
식당일을 하는 틈틈이 농사를 지었다. 동트기 전에 일어나 한나절 일을 하고 출근을 했다. 퇴근 후에는 한밤중까지 밭에서 일을 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웬만한 일은 해장에 다 해치운다. 꼭 두 몫을 한다. 오디를 따도, 양파를 심어도, 김을 매도 여느 사람의 두 몫은 한다.
“원래부터 그렇게 일을 했간디? 허다봉게 그리 된 것이지”
“벌리면 안되야. 한 가지라도 알찌게 해야 돈이 되지, 막 벌린다고 되간디?”
남산떡은 동네 애경사와 궂은일을 도맡아 한다. 동네에서 그래도 젊은 축에 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을 돕고 사는 게 타고난 천성이다.
“이웃간에 으그덕거리지 말고 살아야 혀. 살믄 을매나 산다고, 서로 사이좋게 잘 지내며 살믄 좀좋아”
이웃간에 분쟁이 생기면 나서서 말린다.
“이 나이에 꿈은 무슨 꿈이여. 그저 건강하고 사이좋게 살다가 가면 되지.”
꿈이 뭣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지난번 독립신문 창간 행사 때 주방을 총괄한 남산떡은 준비한다고 했는데 막판에 음식이 좀 모자라서 늦게 오신 분들한테 미안했다며 착한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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