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金坵)는 부여인(扶餘人)인데, 김인경(金仁鏡)·최자(崔滋)가 항상 그 재주를 기특하게 여기었다. 당시에는 온 나라가 불교를 대단히 숭상하였다. 상하 모든 사람들이 복을 구하는 장소라고 절을 분주하게 다녔다. 최항(崔沆)이 《원각경(圓覺經)》을 새기고 김구에게 발문을 지으라고 하니, 구가 시를 지어 비방하자, 항이 노하여 좌천시켰다.
시(詩)에 이르기를,
蜂歌蝶舞百花新 (봉가접무백화신)  벌 노래 나비 춤에 온갖 꽃 새로운데 
摠是華藏藏裏珍 (총시화장장리진)  모든 빛나는 것 감추니 감춘 속이 보배로다 
終日口秋口秋說圓覺 (종일추추설원각)  종일토록 시끄럽게 《원각경》을 설법하니 
不如緘口過殘春 (불여함구과잔춘)  입 다물고 남은 봄 보내니만 못하리라 
하니, 항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입을 다물고 있으란 말이냐?”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이장용(李藏用)·유경(柳璥)이 번갈아 글을 올려 천거하여 이 명이 내린 것이다. 구의 조부는 중[僧]이기 때문에 대간(臺諫)에 있는 것이 마땅하지 않으나 구는 재주가 있어서 고신(告身)을 내렸다.

 

   김종렬
대한노인회 부안군지회 부회장
부안문화원 이사
청람진묵회 회장
전국노인서예대전 초대작가
서울아카데미 미술협회 심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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