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가는 길, 진녹의 너른 벌판이 창밖으로 펼쳐져 있다. 에움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볏잎이 땅심을 받았는지 창창하다. 풀잎은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매미소리는 차창으로 다가왔다가 메아리처럼 멀어진다.
 부안에 살면서도 내 고장에 있는 청자박물관에 가 볼 기회가 없었다. 교과서를 통해서나 접했던 청자는 남의 이야기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수필창작반에서 청자박물관 기행이 잡힌 것이다.
 지척에 있는 청자박물관도 모르고 살았듯 나를 잊고 산 세월이 문득 서글퍼 올 때쯤 커다란 찻잔 모양을 하고 있는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청자상감당초문완을 형상화한 건물인데 비색翡色을 띠고 있었다.
 해설사의 도움을 받아 도자기의 변천사에 대해 들었다. 도자기는 도기와 자기로 구분하는데 배합하는 원료의 종류와 소성온도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했다. 도기는 자기瓷器보다 낮은 800~1200도 이하의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어서 색깔도 흙빛이 돌고 습기를 머금고 있으며 두드리면 둔탁한 소리가 난다고 했다. 이에 반해 자기는 진흙에 돌가루를 혼합하여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소성시킨 것으로, 단단한 유리질로 빛이 드나들 수 있으며 두드렸을 때 맑은 울림이 있다고 했다. 실제 보는 것만으로도 맑은 소리가 공명처럼 자기 속에 머무는 것 같았다.
 천 년 전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상감청자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상감청자는 그릇 표면에 홈을 파고 파여진 부분에 다른 색깔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무늬를 나타낸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생각해 낸 독자적인 무늬새김기법이었다. 더욱이 부안은 고려청자가 전성기를 맞았던 13세기 즈음 청자의 주산지였다. 당시 부안지역은 수목이 울창하여 땔감이 풍부하고 물과 흙이 좋아 산지로서의 적합함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때문에 당대의 수도였던 개경을 비롯하여 바닷길로도 도자기가 널리 유통되었지 싶다.
 그 시절 실생활에서 손쉽게 쓰인 도기에 비해 자기는 왕실이나 귀족들에게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부와 권력의 상징 속에는 장인의 땀도 있었거니와 힘없는 백성의 땀도 간과할 수 없다. 때로는 땔감의 무게에 주저앉았을 것이고, 끝을 알 수 없는 바닷길을 오갈 땐 험한 풍랑과 싸워야 했을 것이다. 이처럼 처처에 녹아든 질고가 없었던들 아름다운 자기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을까.
 더하여 상감청자에 그려진 동물과 식물, 자연을 주제로 한 다양한 문양들은 인간과 자연이 하나이며 염원을 담고 있다. 구름과 학은 장수를, 모란꽃은 부귀와 영화를, 참외처럼 씨가 많은 과일은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다. 상감무늬에서 고려자기 장인의 예술혼을 엿볼 수 있었고, 염원을 담았을 그들의 숨결이 모형가마터에서 느껴졌다. 뜨거운 열을 견디어야만 청아한 소리를 내어 아름다울 수 있는 자기瓷器.
 삶도 견뎌내야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머물 때쯤 자기의 실금에 눈이 갔다. 해설사는 유약을 바른 자기를 가마에서 꺼낼 때 온도차에 의해 빙렬이 생긴다고 했다. 자연현상마저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도공의 혼이 오롯이 박물관에 머무는 것 같았다. 마치 얼음이 갈라진 듯한 무늬. 물의 빙점과 불의 극점이 혼재된 극과 극의 멋스러움. 기다림 끝에 빙렬소리를 들었을 그들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인간의 삶도 극과 극 속에서 금이 생겨 서로를 아프게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도자기의 빙렬처럼 반목도 아름다워지는 과정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청자박물관을 나와 집으로 가는 길, 빙렬의 잔상 때문인지 생각이 꼬리를 문다. 때로 내 삶도 빙렬의 흔적처럼 조각조각 금이 갈지 모른다. 그러나 그 또한 내 삶의 조각이기에 받아들여야 할 연이지 싶다. 다만 그 빛깔이 비취색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아쉬움을 뒤로 청자박물관 인근에 있는 흙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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