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족상잔의 이념전쟁이 일어난 6월25일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전쟁이 멈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53년 7월27일 10시12분에 유엔군측 수석대표인 윌리엄 해리슨 중장과 공산측 수석대표인 북한군 남일이 정전협정서에 서명했다.
이 정전협정의 정식명칭은 “국제연합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코리아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다. 협정 당사자인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중공인민지원군 사령원 펑더하이가 이날 최종 서명을 해 협정의 효력이 발생했다. 이날 한반도는 세상에서 가장 긴 휴전의 터널 속으로 들어섰다. 한반도는 아직도 이 캄캄한 터널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처음 종전회담을 연 이래 총 765번의 크고 작은 회담을 거쳐 2년 만에 마침내 휴전이 이루어졌다. 정전협정서는 서언과 전문 5조 63항, 부록 11조 26항으로 짜였다. 한국어와 영어 및 중국어로 된 원본이 각 3부씩 9부였으며, 부본 역시 9부로 판문점에서 만난 윌리엄 해리슨과 남일은 총 18부의 정전협정서에 함께 서명을 했다.
같은 날 오후 1시,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문산에 있는 미군부대 안에서 최덕신 한국군 대표와 참전 16개국의 대표들이 입회한 가운데 정전협정서에 확인 서명을 했다. 이로써 모든 전선에서 전투가 그쳤다. 또한 이 정전협정에 근거해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가 확정됐으며,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가 판문점에 설치됐다. 또한 중립국감시위원단이 8월1일 발족했다.
지금은 ‘정전협정은 유효하되 협정 조항은 유명무실해진 상황’이다. 그 변곡점은 멀리 2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1년 3월, 주한유엔군 사령관은 한국군 장성을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북한은 바로 그 다음 달인 4월에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했다. 북한은 정전협정 당사국이 아닌 한국의 군인이 정전위원회의 대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같은 해 12월에는 중국도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정전상태를 관리하는 정전위원회의 한쪽 상대방이 없어진 것이다. 또한 북한은 공산측이 임명한 중립국감시단도 1995년에 모두 추방했다. 정전상태를 감시하는 조직도 한쪽이 없는 상태로 빈 껍질만 남았다.
북한은 1974년부터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자고 주장해 왔다. 북한의 정전협정 무력화 시도는 이미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은 한국을 제외하고 정전협정 당시 서명을 한 유엔군 총사령관이 미국인임을 내세워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은 한국전쟁 당시 주된 교전당사국이므로 실질적인 평화협정 당사자로서 자격이 있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1997년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전 당사국인 남북한과 미국, 중국이 모여 4자회담을 가진 적이 있다. 물론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 현재 남한은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위임한 상태이므로 평화협정 대상이 아니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 할 말이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남북한은 모두 내심으로야 어찌됐든 평화와 통일을 앞에 내세운다. 하지만 정전협정회담이 진행되던 당시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고집했기 때문에  명분상 정전협정에 참여할 수 없었다.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긴 것도 이승만이었다. 노회한 독재자 이승만의 권력연장 꼼수가 6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북 간의 평화 협상을 방해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이승만의 “휴전반대 북진통일”에 맞서 당시 서울대생 한 사람이 “전쟁반대 평화통일”을 홀로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조봉암 선생처럼 빨갱이로 몰려 사형 언도를 받거나 ‘미친놈’으로 진단 받아 실제 정신병원에 보내지기도 했다. 지금 그의 나이는 어언 80대 중반에 이르렀다. 60여 년 동안 오로지 평화통일만을 위해 싸워온 그의 이름은 김낙중이다. 그가 27일 익산 원광대학교에 온다. <남이랑북이랑>이 초청해 원광대 이재봉 교수와 대담을 나누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남북한이 컴컴한 전쟁의 터널을 빠져나와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로서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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