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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언론이다 - 프랑스 언론환경에서 배운다
   
 

3. 꼴라보와 레지스탕스

1940년의 패배와 휴전 이후 프랑스는 북부의 "점령 지역"과 남부 "자유 지역"으로 양분되었다. 전쟁으로 말미암아 프랑스 전지역 - 점령지 뿐만 아니라 자유지역 필맆 뻬땅(Philippe Pétain)에 의한 비시 정권의 언론 및 인쇄물에 까지 독일과 꼴라보들에 의한 검열과 압수가 시작된다. 많은 언론은 스스로 자진 폐업과 축소로 저항을 표현했으며 레지스탕스 운동과 함께 "불법적인(?)" 지하 언론으로 변신을 자처하게 되는데 전쟁이라는 제약조건은 당시 언론을 대표하던 신문인쇄를 위한 종이 공급에도 많은 제한을 주게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인 사회 뿐만 아니라 언론 및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지식층 꼴라보(collaboration) 들이 나타나게 되어 지하에 은둔하게 되는 저항(resistance)운동과 함께 프랑스의 사회는 양분화되는 카오스 속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체감되기도 전인 1936년 7월 달라디에 법령에 의해 헌재 직속으로 프랑스 정보부(CGI)가 설립되는데 외교관 출신 지라두를 수장으로 메디아를 장악하고 독일 나치에 반하는 여론 형성의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나 1940년 4월 패전 이후 "국립 선전 정보부"로 변신하면서 프랑스 국민에게 패배를 인정하고 꼴라보를 받아들이도록 극장에서의 뉴스와 국립 라디오 방송 및 언론을 이용해 지지를 천명한다.

이런 즈음 프랑스 주류 언론들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로 나누어 지게 되는데 : * "르 까나 엉쉐네(Le Canard enchaîné)", "랭트라시제엉(L'Intransigeant)", "르 포풀래(Le Populaire)" 및 "류마니떼(L'Humanité)" 등의 자진 폐간
* 인쇄소가 집중 되어 있는 리용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 지역"에만 제한적 발행하는 부분 폐간 - "르 주르날(Le Journal)", "파리 수와(Paris-Soir)" 및 "르 피가로(le Figaro)"
* 새롭게 점령 지역까지 발행 하는 - "주 쉬이 파르뚜(Je suis partout)" 와 "르 마땡(Le Matin)".

대부분 꼴라보 언론들은 "점령 지역"에 발행 되면서 점령군에 의한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거나 독일 대사 "오토 아베츠"의 "에디션 르 뽀앵"에 의해 암묵적으로 압수상태에 놓였던 언론들이였다. 특히 파리지역의 언론은 꼴라보의 대명사와 같은 파리언론협회 의장인 "장 루체르"가 1940년 "레 누보 떵(Les Nouveaux Temps)"을 창간하고 언론을 장악한다. 또한 그는 전국언론협의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대부분의 중소 언론과 출판사들을 루체르파로 영입시키고 다른 일부는 경시청의 영향력 아래에 두면서 사상검열을 하게 하여 북부 점령지의 막강한 권력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 즈음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은 점령지역에 근본적인 프로파간다를 실행하는데 "프로파간다 스테팔"이라는 기치 아래에 언론의 검열을 강화한다. 극단의 꼴라보들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의 언론 부역자들은 (당시 프랑스 직장은 봉쇄 당했지만) 두배의 봉급을 받게 되어 꼴라보의 길을 선택하는 기회주의자가 되거나 "프로파간다 스테팔"에 이데올로기를 팔아먹는 비열함으로 변절하게 된다.          
반대로 자유지역에 속해 있는 남부언론은 자체 검열을 통해 페땅의 반유대주의와 꼴라보 정책을 지지하게 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공식적인 모든 언론이 정보국 산하 국가정보선전부의 통제를 받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의 여론은 꼴라보 프로파간다에 대해 점점 반전을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점점 늘어나는 무가지(30~50%)와 레지스탕스에 의해 만들어지는 저항신문 "프랑-띠뤄(Franc-Tireur)", "꽁바(Combat) 및 "리베라씨옹(Libération)" 등의 약진에 의해서였다.

최초 레지스탕스에 의해 제작되었던 무가지 형태의 소식지는 1939년 정부 프로파간다에 대항 했던 "발미(Valmy)" 였다. 1942년 독일 SS 장군 칼 오베르그는 레지스탕스 언론에 저항의 글을 올리는 작가와 지식층을 탄압하기 위해 점령지역 모든 시청에 시펜하프트라는 악명 높은 연좌제를 공시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44년 한 해 동안 1200 여종의 언론 출판물이 약 2백만부씩이나 발행되었으며 전쟁 기간 동안 누적 발행 부수 1억부에 이르게 되었다. 

레지스탕스 언론들의 면모를 살펴 본다면:
* 꽁바(Combat) : "자유프랑스운동"의 결과물인 리베떼(Liberté)와 베리떼(Vérité)의 통합이 이루어져 앙리 베르네와 베티 알브레흐트에 의해 1941년 12월에 창간된다. 1943년 끌로드 부르데가 이어 받았지만 다음해 4월 독일군에 의해 체포되고 다시 파스칼 피아가 발행인으로 폐간 될 때까지 총 58회 발간되었다. 조지 비도 등의 많은 편집자들이 꽁바의 주 편집인으로 활약을 했었지만 1944년부터 47년까지 끌로드 부르데와 함께 주 편집을 맡았던 알베르 까뮈에 의해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 데팡스 드 라 프랑스(Défense de la France) :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저항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필맆 비아네에 의해 창간되었는데 총 47회의 발간본을 발행했고 장 다니엘 및 드골 대통령의 조카딸 젠비에브 드골이 함께 참여했다. 이후 현 리베라씨옹의 피에르 라자레프에 의해 알 라 후싸드(à la hussarde)로 승계되었으며 오늘날 현존하는 프랑스 수와(France-Soir)로 이어져 내려온다.
* 프랑-띠뤄(Franc-Tireur) : 급진사회주의 운동에서 비롯되었던 이 월간지는 장-피에르 레비에 의해 1941년 12월 창간되었는데 동시에 같은 이름의 레지스탕스 조직과 함께 시작되어 39개의 발행본을 만들어 내었다. 프랑-띠뤄는 1957년 까지 이어져 내려와 시노 델 듀카에 의해 소유권이 이전 되어 파리-주르날(Paris-Journal)을 거쳐 1972년 폐간된 파리 주르(Paris Jour)로 이어졌다.
* 류마니떼(L'Humanité) : 프랑스공산당의 공식 대변지였지만 달라디에 정권 하에 1939년 8월 불법 간행물 판결 이후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1940년 6월 점령지 파리에서 당의 1인자 였던 자끄 듀끌로는 모스크바의 지원을 받아 정식 간행물로 재승인을 협상하게 되었지만 결렬 되었다. 류마니떼는 페땅의 비시 정부를 비난했었지만 독일 측과는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 했었던 것이 특이한 점이다. 독일 치하를 벗어날 때까지 총 317회의 발간을 했고 그 이후 1944년 8월부터는 리베라씨옹 드 파리(Libération de Paris)로 승계 되었다.   
* 프롱 나쇼날(Front national) : 프랑스공산당에 의해 주관 되었던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여러 형태의 간행물을 발행 하는데 레 레트르 프랑세즈(Les Lettres françaises), 에꼴 라이끄(L'École laïque), 메디상 프랑세(Le Médecin français), 뮤직시앙 오주르뒤(Musiciens d'Aujourd'hui), 류니베시떼 리브르(L'Université libre) 등의 많은 저항 언론으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 떼무와나쥐 크레띠앙(Témoignage chrétien) : 1941년 11월 리용(Lyon)의 예수회의파의 신부 피에르 샤이예에 의해 "기독교인의 간증 노트"라는 첫 간행물을 시발점으로 창간되었다. "프랑스여 너의 영혼을 방어하라!"라는 타이틀로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나치에 항거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이 간행물은 신부 가스통 페사드에 의해 편집 주관 되었는데 리용 푸비에르 신학대 예수회의파 주축으로 시작되었지만 카톨릭 계열과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합류가 이어지게 되어 1943년에는 20만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떼무와나쥐 크레띠앙이 다른 저항 언론에 비해 다른 점은 무력에 의한 항거보다도 "정신적인 저항"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바티칸은 2차 세계대전 동안 나치의 학살과 약탈을 묵인하고 냉담한 자세로 일관했었는데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바티칸과 항상 대립각을 서슴치 않았던 리용 카톨릭 교구의 혁명적인 정신을 표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쟁의 잔인함과 불행은 모든 구성원들 속에 각각의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착상하게 되지만 언론과 언론인의 자세는 그 어떤 때 보다도 용기를 요구 받게 되었고 그들의 위선적인 행보는 많은 프랑스인들에게 할당되는 고통의 무게를 가중시킨다는 교훈을 학습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자유가 찾아온 프랑스에서는 1945년부터 1953년 까지 그 유명한 꼴라보의 숙청작업을 단행한다. 30만 건의 수사 서류, 12만7천 건의 기소, 9만7천 건의 유죄 판결, 약 2천 건의 사형 집행 그리고 약 1만 여명의 법외 처형이 집행 된다. 특히 그 첫번 째 줄에는 꼴라보 언론인과 지식인들이 서 있어야만 했었다.                다음호에 계속

심광보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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