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권이 탄생한 것은 박정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있던 해에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국민들은 박정희를 꼽았었다.
1930년대, 혹은 1940년대에 태어난 분들은 박정희와 더불어 청춘을 보냈다. 박정희는 1917년생으로 1960년에 5월 16일에 군사구테타를 일으키는데 당시 나이가 43세였다. 이 젊은 독재자와 더불어 한창 젊은 시절 18년을 보낸 것이다. 그러면서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지켜보고, 그 현장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통제된 언론에 의해 박정희의 영웅적인 이미지만 보고, 그렇게 믿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가 61세 되던 해 갑자기 부하의 총에 맞아 죽었을 때 그 충격은 엄청났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 죽음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어울리는 영웅적인 죽음이 아니라, 안가라는 곳에서 향락적인 술판을 벌이다 당한 치졸한 죽음이었기에 더욱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권. 돌이켜 보면 격동의 시기다. 이 시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은 박정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 결과 그 딸이 대통령이 되었다.
필자같은 젊은 사람들은 이 상황을 이해하기가 너무 힘들었는데, 최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발견한 것같다. 이해를 할 수 있으면 치료도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환상통’이라는 것이 있다.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손이 잘린 경우, 사고 후에도 마치 그 손이 있는 것처럼 아픈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환상통이라고 한다. 잘려 없어진 손에서 느끼는 통증이라니. 이런 현상은 뇌에서 그 손의 부재를 인정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너무 갑자기 닥친 일이라 그것을 ‘뇌신경’에서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다. 점진적으로 없어지는 경우에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이런 현상이 사회적으로도 발생한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유가족이 느끼는 고통을 이런 환상통을 통해서 설명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갑작스런 부재 현상을 유가족들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은 충분히 이야기하고 충분히 슬퍼하게 하고 충분히 기리도록 해서 이제 그만 놓아주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유가족이 슬퍼할까봐 죽은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아이에 대하여 더 많이 이야기해주고, 들어주는 것이 도리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박정희를 따르던 사람들의 마음 상태가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박정희는 죽었지만 박정희를 보내지 못한 것이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부재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박근혜 정부는 축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내야 할 분을 보내드릴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서운하거나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박근혜를 통해서 박정희를 되돌아 보고 옛날에 가졌던 생각을 다시 짚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침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일이 요즈음도 벌어지고 있다.
박정희를 너무 존경했던 이명박과,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박정희가 만들었던 ‘중앙정보부’의 후신 지금의 ‘국가정보원’을 너무 좋아했다. 그래서 대선에도 개입하고 댓글도 달고 여러 가지 공작들을 많이 해왔다.
지금 또 다시 그 일이 불거지고 있다. 불법사찰! 국정원이 국민들을 불법적으로 살펴보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애매하게 국민들이지, 사실은 정치적 반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적 반대자에 대하여 불법적으로 탄압하는 것이 그 시대에는 ‘당연한 일’이었고, 그 딸이 지금 다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대를 다시 불러와 비교해 보면서 박정희를 다시 그려보자.
그 시절에는 정부를 비판하는 자를 신고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옆에서 정부를 비판하던 사람을 신고했던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직접 협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일을 옳다고 여기고 있었던 사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시대가 그리운가?
박정희 시대에는 사람들이 정말 모르고 있었을 수 있다. 그 때는 정부의 힘에 짓눌리거나 혹은 속아 넘어가서 좋은 의도로 열심히 정부 시책에 따르고 애국가 부르며 살았을 수 있다. 그 때에는 모든 언론은 통제되어 있어서 어떤 다른 소리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 대가로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가 있다. 이제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모든 언론이 감추지는 못한다. 적어도 그 때처럼 쉽게 아무 곳에서나 맞지는 않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은 불의를 불의라 외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그 때와는 다르게 판단할 수 있다. 그 때는 모르고 그렇게 판단했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지금은 명백하게 불법적이고 반민주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행동은 동일한데 하나는 아무 것도 몰랐거나, 알았어도 아무 소리 못했고 말았다. 지금은 같은 행동을 불법이고 비민주적인 행동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둘을 비교해 보면 박정희의 모습의 실체가 박근혜를 통해서 드러난다. 
이제 환상통에서 벗어나야 할 때가 된 것같다. 그 시절을 충분히 이야기해 보면서 그 야만스런 시대를 이제 그리워하지 말고, 이제 저 역사의 뒤안길로 놓아보내야 하지 않을까? 젊은 혈기로 그들에 동조하면서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도 이제 살 날이 산 날보다 적게 남았다는 것이 분명해진 현재 시점에서 ‘자기 기만’이나 ‘자기 합리화’로 여생을 거짓되게 살려 해서는 안된다. 그 시절의 자신을 용서하고, 이제 과거를 지나가게 놓아주어야 한다. 과거를 가져다가 미래를 막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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