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은 야트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곳이다. 멀지 않은 곳에는 산책할 수 있는 산이 있다. 작은 산이지만 늘 새로운 모습을 보면 겸손해진다.
늦은 밤 가끔 들려오는 부엉이 소리도 정겹지만 아침마다 듣는 새소리는 덤이다. 하지만 이곳에 이사 온 후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남편은 마지못해 했었다. 시내에서 동떨어진 곳이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남편은 산행에 앞장 설 때가 있다.
오늘도 여느 때처럼 산에 오를 생각에 내 콧노래가 방안 가득이다. 지척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한다. 무엇을 하는지 부재중 안내만 들려온다. 창밖으로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과 남편의 출근길을 내려다본다. 멀리 바쁜 하루가 움직이고 있다. 서둘러 설거지와 청소를 끝내고 물병을 챙기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통화가 안 되었던 친구다. 그는 나이가 나보다 세 살 아래지만 어떤 땐 언니처럼 어른스럽다. 오랫동안 한동네에서 조석상봉 살아오다 사오년 동안 떨어져 살았었다. 몸이 멀어지자 마음도 멀어졌었다. 가끔 전화로 근황을 묻기는 했지만 근처에 살 때만은 못했다.
아이들 교육문제가 해결되고, 그러니까 작년에 다시 친구집 근처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산이 좋아 지경이 높은 곳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기도 하지만 친구와 지척에 살고 싶은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사 온 후로 그동안 떨어져 살았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친구와 나는 늘 뒷산에 오르곤 한다. 전화를 받자마자 허겁지겁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니 집 앞으로 갈게.”
서둘러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잠깐의 시간이지만 답답하게 느껴진다. 도착 신호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빠져나온다. 저만치 친구가 걸어오고 있다. 벌써 주부들은 삼삼오오 언덕길을 지나 산에 오르고 있다. 삶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이 산은 도심 속에 자리한 아담한 산이다. 정상을 향해 걷는다. 오솔길을 따라 걸으며 남편과 아이들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다랑 밭가 매화나무는 엊그제 꽃이 피었나 싶더니 어느새 매실이 탱글탱글하다. 가지마다 알알이 붙은 매실을 보니 오래전 돌아가신 친정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단감나무 과수원을 했었다. 지금처럼 흔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당신 몸으로 억척스럽게 과수원을 일구셨다. 그래서인지 동네 사람들은 부모님을 억척네라 불렀다. 이후 자연스럽게 농장이름이 억척농장이 되었다.
아버지는 농장 이름값을 몸으로 대신하듯 늘 몸에는 파스가 붙어 있었고 방안에는 약봉지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과수원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감나무가 꽃을 피우고 열매가 맺힐 때까지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고 여름이 되면 무성해진 풀을 베어 주어야 한다. 가을이면 수확해야 하기에 정신없이 지나가고 겨울에도 쉴 틈 없이 전지를 해야 한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버지가 과수원을 키우고 나를 키웠듯.
발치에 참나무 잎 하나 떨어진다. 기억을 걷어내려는 듯 향긋한 풀냄새가 코끝을 간질이고 하루가 다르게 풍성함이 더해간다. 제비꽃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것 같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강아지풀도 반갑다고 손을 흔든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한참을 오른다. 친구는 어디로 전화를 하는 것인지 내내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산에 온 걸 자랑이라도 하는가 보다. 무릎이 아프고 땀이 흐르지만 숲이 안겨주는 소소한 기쁨을 알기에 멈출 수가 없다. 삶도 그렇지 싶다. 어렵다 해서 비켜 갈 수 없듯 산행 또한 그런 것 같다.
산뜻한 옷으로 갈아입은 오월은 연두의 물결이다. 빛을 받은 이파리가 눈부시다. 그제서야 잠시 쉬었다가자며 친구가 손을 잡아끈다. 편평한 바위에 앉아 가쁜 숨을 고른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경들이 침묵으로 전해지고 오가는 차량들은 가다 서다를 반복한다. 준비한 물 한 잔을 따른다.
친구와 함께 하는 산행은 일상의 고민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모든 것이 변해 있는데 친구는 변함없이 한결 같은 마음새다. 옛날 타지로 이사하기 전에도 항상 붙어 다녀 자매로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남편과 다툰 일에서부터 사소한 일까지도 서로 나누다 보면 살아가는 마음의 에너지를 얻는다. 나와 친구 사이에 헤어져 있던 시간만큼의 가로막힌 산이 있었지만 마음만은 늘 보듬어 주는 이해와 사랑이 있었음이 느껴지는 산행이다. 내가 산에 오르는 것도 산이 나를 마중하는 것도 이 친구처럼 또 하나의 관계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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