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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의 차문화 - "차나무가 있으면 문화도 있었어야 하지 않나요?"
  • 조인숙(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
  • 승인 2015.06.26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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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문대작
물론 있습니다. 깜짝 놀랄 일들이 일어났었습니다. 지난 글을 통해, 부안 차나무의 유구한 역사성에 자긍심이 좀 느껴지셨나요? 차라는 물질이 인간사 살아가는데 꼭 있어야하는 물건이 아니었듯이 차문화에 대한 생각도 그러한 것 같습니다.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그러나 천혜의 지형과 그로 인한 풍부한 자원이 형성되었던 부안에 있었던 차문화에 대한 관심은 부안 사랑입니다.
문화는 물질의 번성을 전제로 나타납니다. 차문화는 차나무라는 물질을 전제로 발달을 했습니다. 저는 부안에는 차나무가 백제때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따라서 백제의 차문화도 언급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차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발달하였던 시기는 고려입니다. 나라의 안정과 불교라는 문화와 위상이 차문화 발달요인이었습니다. 사찰에서 차는 필수품이었으며, 불교를 숭상하던 왕실에서도 차는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왕이 직접 차를 맷돌에 갈아(당시에는 차를 덩어리로 만들었다가 맷돌에 갈아 가루로 만들어, 끓여서 마시던 시기입니다) 부처님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이를 말해줍니다. 특히 국가의 큰 행사에나, 사신을 맞이하는 예식에서는 차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왕과 왕실에서 국가의 행사에 차가 필수품이었으니 차와 관련된 일들이 발달하지 않을 수 없었겠죠.
이런 차의 발달이 고려시대 도자기 발달을 유도했다는 학자들 의견도 있습니다. 차를 만들고 담아내는 도구는 일반 음식그릇과는 별도로 만들어냅니다. 차는 맑고 담담한 것이어서 다른 음식을 담아 쓰던 그릇에 사용하지 않고 전용그릇을 사용합니다. 부처님께, 왕께 올려야하는 그릇이니까 당연히 새롭고 최고의 것을 만들어야 했겠지요. 물병, 사발, 꽃병, 향로 등 차와 관련된 그릇들이 아름답게 만들어져 사용되었습니다.
부안 차문화 첫 번째 모습은, 도자기 발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부안은 고려청자의 고장입니다. 도요지가 있었던 곳은 진서리, 우동리, 유천리, 신복리 등지입니다.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입니다. 기억하시나요?『세종실록지리지』에 부안에 차가 나던 지역이 상서면 감교리와 보안면 사창리로 기록되었다는 내용을. 짐작하셨죠? 도자기가 만들어지던 지역과 차가 나던 지역의 일치! 차의 발달은 도자기 발달의 동력이었는데, 부안에는 이 둘의 생산지역이 일치합니다. 그렇다고 고려시대에 부안에 차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고려의 이규보라는 인물에 잠깐 기대봅니다. 이규보는 차를 몹시 좋아했던 고려의 대표적 차인입니다. 이 분이 남긴 기록에서 도자기와 차를 동시에 읽어볼 수 있습니다. 부안이 도자기가 발달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땔감 공급인데, 이규보는 그 재목이 좋은 곳이 변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원효방에서 차를 마셨다는 애기를 남겼습니다. 차와 도자기의 공생적 발달이 주목되는 가운데, 이규보의 기록은 차와 도자기 역사에서 공히 유용한 자료입니다. 더군다나 차를 좋아한 고려시대 대표 차인이었다는 점도 간과하기에는, 상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부안 차문화 두 번째 위상은, 조선시대 문인들이 남긴 차와 관련된 기록에서 우뚝 솟아 오릅니다. 먼저 허균이 등장합니다. 허균은 조선 중기의 대표 차인으로 차를 마시고 난 후 쓴 시가 6수 전하며, 그 외에도 여러 글에서 차를 언급했습니다. ‘깨끗이 솥을 씻고 새물 길어 차 끓이기’를 좋아했으며, ‘적막한 겨울밤에 눈 녹은 물을 부어 새로 만든 차를 끓이는데 불이 활활 타고 물맛이 좋으니, 이 차 맛은 제호(醍醐)와 다름이 없다’고 차 맛에 대한 평도 합니다. 특히『한정록』에는 차 달이기, 차를 대하는 행동거지 등에 관한 대목을 수록하였습니다. 차를 즐기던 경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그런 그가『도문대작』에서는 ‘순천에서 나는 작설차가 으뜸이며, 그 다음은 변산’이라 했습니다. 도문대작은 허균 자신이 직접 그곳을 찾고 음식을 맛본 것으로, 식품과 음식의 실상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는 점에서 부안 작설차 우수성에 대한 언급에서 가슴이 펴집니다.
다음 등장은 이운해와 부풍향차보입니다. 이운해(李運海, 1710-?)는 차에 약재를 섞어 만든 향약차를 만들고 그 내용을 적어 부풍향차보라 이름 붙였습니다. 이운해는 전주 이씨로 영조대에 승정원일기 일에 참여했습니다. 영조 28에는 대망에 올랐는데, 이시번의 일로 인해 반대를 당합니다. 이운해가 부안현감으로 온 것은 그 후의 일로, 1754년 10월 3일이라 합니다. 
이운해는 부풍에 부임해 와서, 근처 선운사에 좋은 차가 난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은 관민할 것 없이 차에 대해 무지하여 보통 잡목처럼 보아 부목감으로나 쓰기 일쑤였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이운해는 관노를 선운사로 보내 그곳의 작설차를 채취해 오게 합니다. 때마침 부안에 들른 이운해의 종숙도 새 차를 만드는 일에 합세합니다. 모두 7종의 상차를 만들었습니다. 각 차별로 특정 증상에 약효가 있는 향약차(香藥茶)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차를 만든 곳이 부풍이었으므로 책 이름을 《부풍향차보》라 한다고 적었습니다. 260년전 부안에서 차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는 아예 어깨가 들썩입니다. 
부풍향차보는 따로 전하지 않고, 고창이 고향인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의 문집인『이재난고』에 실려 있습니다. 황윤석은 매일 일기를 썼는데, 부안에서 부풍향차보에 대한 애기를 듣고 그것을 기록한다고 밝혔습니다.  
 
   
▲ 부풍향차보
부풍향차보는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큰 획을 남긴 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차와 관련된 시는 많이 남아 있지만, 차에 대한 종합적인 글로 이루어진 차 책은 별로 없습니다. 조선 초기의 다부와 차 책 중에서 많이 알려진 다신전과 동다송은 후기에 나온 것입니다. 다부는 이목이라는 학자가 지은 것으로 차의 효능과 덕, 수양으로서의 차를 노래한, 개인적 성향이 강합니다. 그에 비해 부풍향차보는, 시기적으로는 다부 이후에 나왔지만 향약차 개발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측면에서 보편적인 면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차문화에 대한 인식 폭과 대상을 넓힌 것입니다. 향차로서, 보편적 측면의 차에 대한 기록으로서는 최초인데, 그 글이 260년 전 부안에서 작성되었다는 사실에 전율이 느껴졌습니다. 
이운해는 부안 현감으로 오기 전에 이미 차에 대해 상당한 식견과 조예가 있었던것 같습니다. 차에 대해 무지해서 차나무 보기를 잡목 보듯 하고 심지어 땔감으로 쓰고 있던 상황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차를 만들었습니다. 특정 증상에 효능이 있는 약재를 작설차에 가미해서 각종 증상에 맞춰 마시도록 한 차입니다. 즉, 증상에 따라 차를 다른 식물과 섞어 만든 기능성을 고려한 제다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차를 대용한 음청법과는 다른 차의 효능을 고려한 것으로, 이를 통해 차의 맛과 향과 효능을 고려한 다법의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새 차를 만들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와 같은 제다법은 이운해 현감의 창작품이라 사료됩니다. 이렇게 알차고 당당한 차문화가 살아있는 곳이 부안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조인숙(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  ibuan@ibu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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