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차문화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부안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임금님 진상용 차밭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올 만큼 유래 깊은 차의 고장입니다. 본지는 지난 20여 년간 부안 차와 문화에 대해 공부해 오신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예문화와다도학과 강사 조인숙님의 글을 3회에 걸쳐 싣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편집자 말

글 싣는 순서

1. 부안에도 차가 있습니까?
2. 차나무가 있으면 문화도 있었어야 하지 않나요?
3. 차문화를 보급시키는 노력은 있나요?

   
▲ 개암사 차밭
자신이 좋아하고 잘하는 일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면 참 좋습니다. 그런 면에서 요즘 들어 참 좋습니다. "부안에도 차모임이 있었어요? 그렇게도 오래됐어요?" 얼마나 오래되었기에, 이리 좋아하느냐고요? 20년이 되었습니다. 20년 전에는 오늘만큼의 차문화를 생각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여러 가지 하고 싶은 관심사 중에 한 종류일 뿐이었는데, 지금은 나의 즐거움을 넘어, 역사적 사명감이 우선이지 않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 아줌마 참 웃기지요? 차 좀 마시면서 역사적 사명을 운운하며 깨방정을 떨다니요. 그럼 제가 푸는 타래를 한 번 눈여겨봐주시지요. 판단은 그 뒤에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부안에도 차가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현재, 지역으로는 상서면과 보안면입니다. 상서면에는 개암사입구와 감교리 근방에 있는데, 개암사입구에 있는 차나무는 8년 전에 조성한 것이고요, 감교리 일대는 야생차인 것으로 보입니다. 보안면에는 사업장으로 만들어진 변산제다(대표 김계규)와, 사창리와 우동리 일대에 야생차가 조금씩 있습니다. 

 "야생차가 있다고 했는데 그럼 그 나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확실히 알 수는 없습니다. 기록도 없으니까요. 그러나 추정은 가능합니다. 조선시대 초기에 쓰여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부안현 상서면 감교리와 보안면 사창리에서 나는 차가 공물로 바쳐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세종 때 기록된 곳과 현재 남아있는 곳이 같습니다. 우연일까요? 그렇지 않아 보입니다. 이미 부안의 차는 조선시대에 조정에 공물로 바쳐질 만큼 맛이 좋은 상품의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는 역사적 기록에 입각한 필연적 사실입니다. 
이왕 부안 차의 역사가 언급되었으니, 그 끌텅을 찾아 조금 더 올라가보겠습니다. 조선시대 초기에 기록된 [세종실록지리지]에 부안에서 나는 차가 공물이었다고 했는데, 그럼 그 차나무는 언제부터 있었을까요? 저는 백제시대로 넘어가보려고 합니다.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 1168 ~1241)가 쓴 『동국여지승람』 남행월일기에서 원효방이라는 장소 언급과 ‘차를 마셨다’라고 하는 내용이 그 실마리가 됩니다. 이규보는 1200년 8월 21일 원효방에 옵니다. 원효방 위치에 대한 대략적 설명과 함께, 원효가 머무를 때 사포라는 성인이 원효에게 차를 달여 올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사포성인이라는 이가 옛날 머물던 곳으로,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물이 바위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는 것입니다.
 사포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사포가 언제부터 어떤 차를 마셨는지에 대한 실마리도 찾을 수 없습니다.

   
▲ 원효방
 “어떻게 이 글을 통해 백제시대부터 차가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나요?”
 당시 차 생산 현실을 토대로 추정을 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사포는 원효가 부안에 오기 전부터 차를 마시고 있었고, 그 차는 원효방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라고 있던 야생차나무 잎을 가지고 만들었을 것이다’라고 추정합니다.
우리나라에 차가 크게 보급된 시기는 828년 이후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828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돌아오면서 차 종자를 가지고 돌아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으며, 우리나라에 차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행했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차 종자를 중국에서 들여온 이후, 본격적으로 차나무가 재배되었지만, 그 이전에도 차는 있었다면 그 차는 야생차나무들로 볼 수 있습니다. 야생차나무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양은 많지 않아, 지금과 같이 유통이나 매매 등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왕실이나 귀족, 계급이 높은 승려가 아니었으면 차를 맛보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다만 주변에 차나무가 있다면 상황은 좀 달라집니다. 차는 이미 만들어져 마시고 있었기에, 차나무가 주위에 있다면 지위를 고하하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차를 만들어 마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사포성인도 자신이 머물던 금방에서 차나무를 발견하고 차를 만들어 마셨으며, 마침 원효대사가 오자 큰 스승을 극진히 대접하는 차원에서 차를 올렸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물론 자료가 없어 정확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우리 차문화의 역사는 다양한 요소들을 놓고 계속 연구 중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효방은 한국 차문화의 모든 곳에 백제 차문화의 근거 자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문화는 화려하게 꽃피워졌으나 유적과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백제문화 연구에 애로가 많은데, 차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무녕왕릉에서 찻잔과 미륵사지에서 다수의 찻잔이 발견되는 등 백제 차문화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백제시대에도 차문화가 있었으며, 지리학적으로 차의 생산이 가능했을 것이라 봅니다. 그래서 원효방과 관련해 이규보가 남긴 기록은 사실성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현재 개암사 앞에는 차나무가 심어져있습니다. 8년 전에 당시 주지스님께서, 원효방에 대한 내력과 차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여 조성하고 길러내신 것입니다.
부안 차문화는 이렇게 유구한 역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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