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중요한 약속이 잡혀 있는 날이었다. 막 사무실을 나서려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상담차 방문하셨다. 상기된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닌 게 아니라 고소를 할란다며 억울하다는 사연을 장황하게 털어놓는다. 물건 값을 받아가고도 체불하였다며 영업 사원이 우기는 바람에 분쟁이 되고 말았다는 것. 다행히 그 무렵 통장에서 돈을 인출한 내역이 확인되고 목격한 이웃의 도움으로 외상값을 갚은 사실은 가까스로 밝혀졌다는 것.
그렇게 해결이 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굳이 고소를 하려고 하느냐고 반문했다. 할아버지는 발끈한다. 그간 누명을 쓴 것도 억울한데, 상대방이 잘못 했다고 사과는 하지 않은 채 오히려 잘했다며 변명을 하고 다니는 통에 분해서 못살겠단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아침 숟가락 놓자마자 찾아온 것이란다. 섣불리 물러설 태도가 아니다. 눈빛과 목소리에서 완고함이 묻어난다. 어지간히 설득을 해선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억울함을 해소하고 부당함을 법에 호소한다는 노인의 요구는 일면 타당하기는 하다. 논리적인 접근법으로는 노인을 말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노인네와 젊은 직원이 법전을 사이에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일 고소 사태를 지켜볼 수만도 없다. 또한 중요한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곧장 출발해야 하는 처지이니 나로서도 난감하다.
“할아버지, 내일 갑자기 해가 안 뜨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 모레도 글피도 일주일 내내 아예 해가 안 뜨는 일이 생기면 어찌 될까요?” 이를 듣던 노인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꺼내고 있느냐는 마뜩지 않은 표정이다. 노인의 대답을 듣지 않고 내 방식대로 궤변을 이어갔다.
“갑자기 해가 일주일씩이나, 한 달 내내 뜨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풀들은 말라 죽을 것이고, 꽃들은 져버릴 테고, 나무들도 시들고, 사람들도 병이 생기며, 세상이 발칵 뒤집히겠지요?”
그거야 당연하지 않느냐는 표정이다.
“할아버지,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나, 팔십 둘이여”
“그럼 할아버지가 살아오신 날을 날수로 치면 1년에 365일이니까 3만일 가까이 되네요?”
“할아버지가 살아오시는 동안 흐린 날은 있어도 아예 해가 안 뜬 날은 없지요?”
“3만일 동안 단 하루도 해가 안 떠버린 날은 없었지요?”
“그러니 얼마나 고마워요. 해도 달도 별도 다 고맙지요?”
할아버지는 조금씩 수긍하는 표정으로 변하는 눈치다.
“그거야 고맙고 감사하다고 속으로는 늘 생각허지.”
“그런데 할아버진 말씀으로만 감사하다고 생각했지, 저 해와 달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 그러니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안 했지요? 우리는 모두 빚쟁이라는 생각 말예요.”
이제는 수그러들어 솔깃하며 듣는 태도도 바뀌었단다.
“할아버지 이제 그 빚을 조금씩 갚아야지 않겠어요?”
“그 빚은 돈으로 갚는 건 아닌 것 같고, 할아버지가 오늘처럼 막 화가 나고 억울한 생각이 들 때 꾹 참고 용서를 해주면 저 해와 달에게 빚을 갚는 셈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이미 사실 관계는 밝혀져 할아버지 잘못이 없다는 건 다 드러났으니 그쪽에서 변명하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시면 되고요. 통장이나 잘 보관하고 목격한 분이 계시다니 그쪽에게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서 오히려 웃어 버리면 안 될까요?”
“그쪽은 자기들이 잘못한 줄 알고 있으니 어떻게 못할 것이고 속으로는 오히려 답답할걸요”
“그런데도 할아버지가 그쪽이 변명한다고 화내며 속상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할아버지가 그쪽에게 지는 거잖아요.”
이제 할아버지는 웃으신다. 어이없다는, 그렇지만 알아듣겠다는 표정이다.
“꼭 신부님같이 말하고 있네. 알았어. 고마워. 듣고 보니 내가 화낼 일이 아니고 억울하게 생각만 할 일이 아닌 것 같네 그려.”
“근디 바쁜 사람 붙잡고 상담했으니 그냥 말 순 없고 상담료를 주고 싶은디.”
“할아버지 그러실 것 없고 그냥 웃으면서 돌아가시고, 그 사람들 만나도 웃어버리시면 그걸로 제 시간 뺏은 거 갚는 걸로 할게요.”
고집이 만만치 않은 할아버지는 그대로 물러서지 않는다.
“아녀, 내가 그냥 가면 미안해서 잠을 못자지. 그러니께 국밥 값이라도 받아야 내가 마음이 편허단 말이여.”
할아버지는 바지 속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한 장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서야 돌아선다. 안 받으면 실랑이가 벌어질 테고, 그러다가 약속시간이 더 늦어질 테고, 그보다 잠을 편히 못 이룰 것 같다고 하니 양보할 수밖에 없다. 가만, 그런데 저건 돈이 아니다. 노인네의 마음 한 조각이다. 꼬깃꼬깃 접어놓았던 마음을 한 조각 떼어 놓고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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