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에 금강산 관광길에 오른 적이 있다. 그곳에서 만난 북한군 장교가 어디서 왔냐고 묻기에, 부안 산다고 하니 ‘아 변산반도요’라며 잘 아는 체를 했다. 어쩌면 다시는 가 보지 못할 수도 있는 그 곳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장교의 입에서 변산반도를 들을 줄이야. 이렇듯 조금만 멀리 벗어나도 사람들은 부안보다 변산반도를 더 먼저 알은 체 한다. 그 만큼 변산반도가 더 유명하다. 부안은 해안도시 같지만, 정작 바다를 가려면 자동차로 족히 20분은 더 달려야 한다. 바다가 보이는 초입이 바람모퉁이다. 바람모퉁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바다를 끼고 길이 구부러져 있어, 자연에 순응한 멋진 길이었다. 지금은 새만금 개발로 옛적 풍광은 모두 사라지고 온통 개발의 잔해만이 널브러져 있다.
바람모퉁이를 넘자마자 망망한 바다가 보이고 비로소 변산반도를 실감한다. 부안은 지리적으로 삼면의 바다와 동진강 하구부터 발달한 갯벌이 태고적부터 뭇 생명을 포근히 감싸주던 땅이다. 바람모퉁이를 시작으로 계화도를 이어 동진강 하구까지는 황금갯벌이다. 계화도에서 출토된 신석기 유물은 기원전 3,000여년의 러시아 바이칼호 연안 키토이기(Kitoi期)의 것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니, 참으로 오래된 인류의 삶의 보고였다. 부안민으로서 자부심이 올라가는 대목이다. 이렇듯 올라간 자부심을 지키지 못한 애기를 해야 할 참이다.
바람모퉁이를 넘으면 변산 가기 전 해창 갯벌이 보인다. 허름한 콘테이너 몇 개와 썩어가는 장승 수십 개, 그리고 한쪽 구석에 머리가 떨어진 매향비(埋香碑, 매향이란, 내세(來世)의 복을 빌기 위하여 강이나 바다 속에 향을 묻는 일로, 향나무를 묻으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향이 아주 좋은 침향이 된다)가 있다.
밀레니엄 진입으로 호들갑을 떨던 2000년 그 해 겨울은 혹독하게 추웠다. 새해가 되고 천년에서 이천년이 되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시화호의 간척 실패로, 새만금 갯벌의 가치에 주목하면서 새만금 간척에 대한 찬반의 많은 문제제기는 있었지만, 해당 지역에서 처음으로 반대의 움직임이 생겼다. 절박함이었을까. 2000년 1월 30일은 영하 10도였다. 그 추위에도 새만금 갯벌이 살아나길 간절히 열망하며, 해창 갯벌에 매향을 했다.

"우리가 선조로부터 물려받았듯이 후대에 물려줄 갯벌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이 비를 세우며 해창 다리에서 서북쪽 300걸음에 매향합니다. "

지금은 사라져, 있었는지조차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해발 220여미터의 해창산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방조제가 마저 막히면 돌이키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마지막 염원과 호소였다. 당시 지역주민들 대부분은 정부의 개발 선전에 현혹되어 개발 환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극소수의 반대론자들은 마치 지역 발전에 암초처럼 역적으로 지탄받던 시절이었다.
만 15년이 지났다.
이제 해창산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해창 갯벌도 사라졌다. 바닷물이 사라진 어느 구석에서 우리의 염원을 담았던 향나무는 침향이 되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을 것이다. 수천수만 년 그렇게 우리를 거두워 주었듯이 앞으로도 수천수만 년 밀레니엄을 넘겨주시라고 염원했던 향나무는 침향이 되지 못하고 썩어가고 있다. 한쪽 구석에 매향비만 덩그러이 반쯤 쓰러져 누워있다. 
매번 해창을 지날 때마다 날로 부식되어가는 콘테이너, 그리고 장승들의 잔해만이 휑하니 잡초 속에 나뒹굴고 있으면 사라진 갯벌만큼이나 마음이 초라하다. 차라리 저것을 치워볼까 하다가도, 흔적들만이라도 그 당시 열정들을 기억하는 것 같아서 머뭇거리고 있다. 문제는 저 깊은 땅 속에서 침향이 되지 못하고 썩어갈 향나무들이다.
방조제 밖으로 옮겨야 할지 아니면 그래도 해수가 드나드는 방조제 안으로 다시 옮겨야 할지 늘 머리만 어지럽다. 부안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새만금 사업을 반대하던 10여명의 동지들은 대부분 부안을 떠나거나 세상을 떴다. 머리만 가진 나에게 손발이 되어 움직이던 그들이 사라진 지금, 상의할 사람도 이곳엔 남아있지 않다.
이제는 부안군민에게 묻습니다.
"해창 갯벌에 묻혀있는 향나무를 어찌할까요?"

저작권자 © 부안독립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