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을 찾으시나요? 마실축제.” 컴퓨터 모니터 검색창 밑에 빨간 글씨가 드러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핀다. 검색란에  “마시축제”라고 쓰여 있다. 오타가 난 것이다. 실수를 밑줄까지 그어 알려주는 대단한 문명은 신의 경지를 초월한 것 같다. 컴퓨터의 단어 유추능력과 기능은 상상, 그 이상이며 바벨탑을 끝없이 쌓고도 남을 능력이다. 신의 위치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컴퓨터에는 감성이 없다는 것이고, 신과 인간에게는 교감할 수 있는 정서가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서핑을 하다보면 “이것을 찾으시나요?”라는 글귀를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가끔은 엉뚱한 것을 알려주기도 하지만 대개는 찾고자 하는 검색어를 척척 알려줘 감동을 자아낸다. 만약 그가 사람이었다면 고깃근이라도 선물하고 싶고, 막걸리라도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다.
 오늘부터 한바탕 소요가 열린다. 해안선을 끼고 도는 경관을 내세운 마실축제가 그것이다. 축제祝祭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비롯된 산물로 신이나 조상에게 복을 바라는 제의에서 비롯된 행위다. 이러한 축제의 성격은 시대를 거치며 문화현상의 한 패러다임으로 바뀌게 되었다. 즈음하여 지자체의 출현은 더 많은 축제의 유형을 만들어 내기에 이르렀고, 수천 개에 이르는 축제는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축제공화국이라 할 만한 하다.
 이를테면 축제의 확산은 야누스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는데, 경제논리에 무게를 둔 유희적 성격을 띤 축제는 지역 간 경쟁이 되어 예산의 과다출혈을 부추겼다. 또한 어디서든 약삭빠른 사람은 있듯, 일부 단체장들은 축제를 자신의 표밭으로 삼아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그러나 축제를 통해 부인할 수 없는 긍정적인 것은 공동체적 삶의 귀환이다. 지역의 고유한 특성을 발판으로 가치추구와 나눔이 어우러지는 마당은 구성원의 일체감을 조성해 통합의 기능을 획득할 수 있다. 아울러 탐방객에게는 그 지역의 문화와 특색을 알리는 공간이 되기도 하며, 자연환경과 예술, 인문환경을 통해 가치를 창출하기도 한다. 결국, 긍정적 견해로 볼 때의 축제는 산업화의 이기로 말미암은 휴머니티의 상실에 대한 대처인 셈이며, 지역문화의 보존과 계승적 차원의 시각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나친 화려함은 눈살을 찌푸리게도 한다. 나는 화려함보다는 품바 같은 하위개념의 하이퍼적 예술이 좋다. 마당 한 귀퉁이를 익살과 해학으로 꿰찬 각설이가 쌍욕을 해도 웃음으로 받아내는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사발에 가라앉은 마음을 깨끼손가락으로 휘휘 저어 나누는 막걸리 맛은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지금의 축제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 지역민의 어우러짐이 그 하나이며, 많은 탐방객을 유도하여 경제적 이득을 꾀해야만 하는 불멸의 명제가 있다. 이 부분이 참으로 어렵다. 경제적인 걸로만 본다면 이웃 동네의 ‘지평선축제’와 아랫마을 ‘함평나비축제’다. 그러나 부러워 할 때만은 아닌 것 같다.
이제 시작이다. 각각의 감당을 위해 밤새워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사람도 있고, 거리형 축제의 전환에 따른 이해관계로 인해 마음을 다친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참여와 배제 사이에서 갈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잠시 내려놓고 손님을 맞아야 한다. 집안싸움을 하다가도 이웃의 기침소리가 나면 멈추는 것이 우리네 정서다. 내 집, 내 고향의 허물이 담을 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제점이 있는 부분은 손님이 돌아간 후 따져 물으면 된다. 군도 피드백의 문을 열어 조언에 귀 기울여야 한다. 무관심처럼 서러운 것은 없다. 엊그제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 선거 투표참여율이 30퍼센트 대에 머물렀다. 당선된 사람이 과연 그 지역의 대표라 할 수 있을까. 불평도 불만도 서운한 점도 모두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애향의 소리로 들어야 하는 이유다. 그리고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혼란이 없는 것은 평화나 일사분란보다 나을 게 없다, 창조는 혼란과 착오를 먹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이제 잔칫상을 내어놓는 만큼 서운한 점이 있어도 컴퓨터처럼 손님에게 ‘친절’을 말 할 때다, 이것을 찾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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