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의 이루지 못한 꿈을 탁구에서

지난 4월 5,6일 양일간 부안스포츠파크에 있는 부안실내체육관에서 전국의 탁구동호인 9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2회 부안쌀 「천년의 솜씨」배 전국 탁구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를 준비하고 부안군의 탁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 부안군 탁구연합회 사무국장 김우진(37)씨를 만났다.
“이번 대회에 특별한 손님이 찾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특별초대 손님으로 유남규 탁구국가대표 감독님이 오셔서 원포인트 레슨도 해주시고 팬싸인회도 하고 해서 대회장을 찾아오신 많은 분들이 즐거워하셨습니다.”
“김우진씨도 최근에 좋은 소식이 있었다면서요?”
“지난달 전라북도 생활체육연합회 대회에서 선수출신 참가자를 포함한 클래스에서 준우승을 했습니다. 기대이상의 결과라서 저도 기뻐했지만 주위 분들이 더 좋아하시고 격려해주셨습니다.”
전문 프로선수로서의 경기는 아니지만 선수출신을 포함한 두터운 생활체육 동호인들의 수를 감안한다면 김우진 씨의 준우승은 결코 쉽게 이룰 수 없는 결과라고 탁구를 아는 이들은 모두 그렇게 이야기한다.
계화도가 고향인 김우진 씨는 사실은 탁구보다는 축구를 더 사랑하고 잘 하는 사람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축구선수생활을 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허정무 감독의 눈에 띄어 국가대표 유소년 팀에 선발될 정도로 장래가 촉망되는 선수였다. 서울소재의 축구명문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아들을 곁에 두고 싶다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익산의 중학교로 축구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의 축구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축구 유학 당시 저는 제가 제 또래에서는 제일 축구를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우선 체력이 좋아서 운동장을 50바퀴를 뛰어도 지치질 않았어요. 초등3학년 무렵부터 아버지랑 매일 아침 계화도에 있는 매봉산을 뛰어서 올라 다녔거든요. 힘들다는 생각도 없었고 운동하는 것이 무지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중학교 진학 후에는 축구보다는 그 이외의 것들이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선배와의 관계, 정신력 강화라는 명목으로 행해지는 얼차려, 비상식적인 체력훈련과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의 구타…….”
“결정적으로 사소한 통증으로 생각했던 무릎이 계속된 훈련과 시합으로 치료시기를 놓치고 결국 MRI판독결과 ‘연골이 거의 없군요. 인대도 많이 손상되었고요’ 결국 ‘선수생활중단’이라는 대학병원 진단으로 저의 빛나던 축구로서의 선수생활은 끝나게 된 거죠. 진단 얼마 전까지도 군산에서 매년 봄에 열리는 금석배 전국축구대회에서 전국의 강호들을 다 제치고 준우승을 이끌며 득점왕과 우수선수상인 미기상을 받았었거든요.”
국가대표의 꿈을 안고 엘리트선수로서 질주하던 어린 선수가 부상과 지도자와의 갈등을 이유로 꿈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래서 힘든 방황의 날들이 이어졌다. 학교는 가기 싫었고 가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그때 방황하던 그를 잡아준 사람이 똑같은 아픔을 겪어본 담임선생님이었다.
‘그 선생님은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것일까?’
달래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선생님은 방황하던 고삐 풀린 망아지를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선생님과 함께 통기타공연을 준비해서 축제에 참여하기도하고 선도 부장을 시켜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야간자습시간에는 체육관에 가서 줄넘기를 3시간 동안 하기도 했습니다. 체육대회가 열릴 때는 저의 존재감이 하늘을 찔렀죠……. 하지만 단 한 가지, 결석은 절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김우진 씨는 비로소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직장에 들어와서는  타고난 운동신경과 선수로서의 경험을 살려 각종 체육행사에 인기폭발의 귀한 몸이 되었다. 그 후 탁월한 운동신경을 눈여겨 본 직장상사 한 분의 추천으로 탁구에 본격적으로 입문한 것이 이제 5년이다. 동호인 탁구대회에서 6단계로 나뉘어있는 실력별 등급을 한해에 한 등급씩 뛰어 오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김우진 씨는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고 동호인들은 말한다.
최근 그는 “김우진 탁구클럽”을 열고 자신의 노하우를 나눠주고자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고 있다. 부상으로 축구선수로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유망주라는 기억에서 벗어나 생활체육으로의 성공한 탁구인에 대한 그의 도전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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