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가 내린다. 을씨년스런 날씨에 거리가 음산하다. 비바람에 마음도 쓸쓸해진다. 친한 친구의 부음도 왔다. ‘짜아식, 그렇게 갔구나.’ 허무한 마음 달랠 방법이 없다. 막걸리 집에 든다. 오늘처럼 비가 내리고 끄무레한 날엔 막걸리가 제격이다. 구석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찌그러진 노란 주전자에 정이 간다. 낯익은 모습이다. 냄새마저 그리움을 남긴다. 어른거리는 기억 하나.

어머니는 작은 면 지역 소재지에서 식당을 운영했다. 말이 음식점이라지만 한 푼이라도 더 손에 쥐어 자식들 건사할 마음에 술을 팔았고, 때로는 분 냄새 나는 여자들도 오가곤 했다. 6남매 의식주를 송두리째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 흔하디흔한 여행이나 소풍 한 번 가지 못했다. 어쩌다 아버지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계모임을 다녀올 때면 눈물범벅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술을 많이 드셔 어머니 애간장을 녹였기 때문이다. 위장 수술 핑계로 평생을 낚시 한량으로 지낸 남편이 얼마나 얄미웠을까. 선거 때만 되면 떨어질 후보 밀다가 막걸리 값도 다 떼이고, 지금 같으면 우리들은 고아 신세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중학교 시절 공부와 축구 외에는 거의 하는 일이 없었다. 가끔 여학생들을 힐긋힐긋 쳐다는 봤지만 다가가지는 못했다. 못생긴 얼굴에 키마져 작다보니 여학생 앞에 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런 콤플렉스를 오로지 공부와 운동으로 메우려 했다.  ‘공부하라’는 부모님의 애절한 소리를 들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알이 통통하게 밴 장딴지는 어릴 때 다져놓은 운동 콤플렉스 덕분이다.
그 시절 나는 16km를 콩나물 버스에 시달리며 통학을 했다. 통학생이 너무 많아 버스가 늘어질 정도였다. 키 작은 나는 선배들의 귀염둥이가 되어 버스 창문을 통해 차 속으로 실려졌다. 의자에 앉은 사람들도 짐짝 올리듯 선뜻 받아 준다. 지금 생각하면 찌든 옷에서 담배냄새가 풀풀 났을 텐데 참아준 통학생들이 고맙다. 악몽의 버스 속을 벗어나 집에 오면 시장처럼 시끌벅적했다.
손님들이 술에 취하면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담배를 피워대며 아가씨 애교에 고성방가는 더 높아만 간다. 손님이 많을 때는 3개의 온 방이 분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진동했다. 교복을 방에다 걸어둘 수밖에 없는 나는 담배연기가 옷에 스며드는 줄을 몰랐다. 어쩐지 통학차에 타면 내 옆에 있는 여학생들이 속닥거리며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그럴 때마다 키 작고 못생긴 탓으로 돌렸다.
어느 날 학교 등굣길에 학생주임 선생님이 교문에 버티고 서 있었다.
“야, 너 이리 와봐! 이 자식 봐라, 쬐고만 놈이 벌써부터·… ” 나의 볼기를 늘려 잡으며 꿀밤을 준다.
“너 교문 옆에 서 있어!”
벌써 대 여섯 명이 벌벌 떨고 서 있었다. 영문도 모른 나는 왜 나를 잡느냐고 항변했다. 날아오는 것은 귀뺨 한 대, 너무 억울했다.
“이 피도 안 마른 놈이 벌써부터 담배를 피워?”
어안이 벙벙했다. 설명할 기회도 없이 쪼그려 뛰기, 팔굽혀펴기 벌을 받았다. 교실로 향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담임선생님께 항변하러 갔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집안사정을 잘 아는 담임선생님은 학생주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나는 학생주임에게 덧붙여 말했다.
“어제 우리 집에 술 먹으러 온 사람들이 담배를 많이 피워 댔어요. 그래서 냄새 나는 것이에요!”
담배냄새가 배인 교복 때문에 곤욕을 치렀지만 그 남정네들 담배연기 속에서 장사를 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더 서러웠다. 어머니가 이른 새벽 싸주신 도시락을 만지작거렸다. 식은 밥이지만 어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졌다.
‘참아라, 아가야, 모두 내 잘못이구나. 미안하다’ 벤치 옆 꽃들이 어머니처럼 말하는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이다. 교무실 밖으로 나와 그늘아래 벤치에 앉았다. 파란 하늘 구름 사이로 눈물 글썽이며 바라보는 어머니의 인자한 웃음이 나를 다시금 일으켜 준다.
‘엄마, 나는 커서 절대 담배 안 피울 거야. 오늘 일을 잊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갈게. 두고 봐 엄마!’

낯익은 얼굴이 출입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만나자 약속한 지인이다. 머리에 묻은 빗방울을 툭툭 털어내며 앞자리에 앉는다. 파전이 테이블에 놓이고 담배연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끽연가들이 즐겨 찾는 이곳에 오면 늘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내 옷에 배일 담배냄새, 그것은 질곡을 이겨내신 내 어머니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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