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쾌한 쇳소리를 이끌며 플로어를 미끄러지듯 잰걸음으로 내달린다. 멈추는 듯 달려가고, 갈듯 말듯 움찔움찔하다 어느새 저편에서 어깨춤을 들썩인다. 조였다 풀었다를 반복하며 끊어질듯 이어가는 가락에 관객은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하얀 깃털로 만든 접시모양의 부포를 연신 이리저리 휘돌리다 정수리위로 단번에 꼿꼿이 세운다. 봉긋하게 선 부포는 사뿐히 내딛는 발걸음을 따라, 그리고 어깨를 타고 흐르는 몸짓에 맞추어 너울너울, 넘실넘실 벌름거린다. 마치 살아있기나 한 듯, 마치 한 몸이라도 된 듯…….
 작년 부안우도농악 발표회장을 열광의 도가니로 만든 나금추(78,여)선생의 부포놀음이 눈에 선하다. 마침 이번 주말에 부안우도농악보존회와 함께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부안농악 기능보유자 나금추선생의 발표회를 가진다고 하여 옆집 할머니 같은 인상의 주인공을 찾아가보았다. “요즘 공연으로 전국을 다니신다고 하시던데요. 누가 수행해 주는 사람이 있나요?”
“제가 직접 운전해서 다닙니다. 내비게이션 찍고 살살 다니면 못가는 데가 없죠”
78세의 나이지만 목소리에 힘이 있는 것이 훨씬 젊게 느껴진다. 도립국악원에 근무하며 강습을 다닐 때는 500CC급의 발칸이라는 오토바이까지 타고 다녔을 정도이니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강렬하게 다가오는 눈빛이 인상적이다.
 부안우도농악보존회장을 겸하고 있는 나금추선생의 호적상의 이름은 나모녀씨이다. 금추는 예명인 셈이다. 전남강진에서 나주 나씨의 8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나모녀씨 집에서는 나막래라 불렀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몰라도 호적에 올릴 때 어찌하여 나모녀로 바뀌었다. 당시엔 그런 일들이 너무도 흔했던 시절이었기에 불평도 불만도 없었다. 광주로 이사를 나와 학교를 다니던 어느 날 광주천변에 임춘앵여성국극단이 찾아왔다. 지금으로 말하면 뮤지컬정도 되는 공연이었다. 그 공연을 보고난 후 선생의 인생역정은 전환점을 맞는다.
“그 공연을 보고 너무도 하고 싶어서 몰래 국악원에 등록하고 판소리부터 배우기를 시작했는데 집에서 알아버린 거야. 오라버니들이 ‘우리 집안에서 국악이 웬 말이냐’하며 장작으로 죽도록 맞았지. 그 후로도 계속 몰래 국악공부를 했는데 집에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겠더라고. 그래서 전파사를 하는 언니네 가게에서 당시 돈 100만원을 품에 안고 약장사를 따라 가출을 했지. 그 당시에는 떠돌이 약장사들이 유명한 국악인들을 초빙해서 공연을 하곤 했거든” 그렇게 떠난 가족과는 결혼 후 둘째 낳을 무렵에야 왕래를 다시하게 되었다.
 광주를 떠나 남원국악원에서 온갖 궂은일을 하며 “춘향여성농악단”의 징수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농악의 길로 접어든다. 처음 시작했던 판소리는 도무지 늘지가 않아서 고민하던 중 꽹과리가락, 장구가락은 알려주지 않아도 어깨너머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몸속에서 꿈틀대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20대 초반에 촉망받는 상쇠가 되어있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효리 정도는 되었지 아마. 젊고, 예쁘고, 재능 있고……. 인기가 말도 못했지” 당시 여성농악단은 주로 넓은 강변에서 지붕 없는 포장을 치고 전국순회공연을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포장이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런 인기도 5,6년이 지나자 시들해졌다. 도시에서는 텔레비전이 밀어내고 시골에서는 국가재건사업에 동원된 주민들이 힘든 노동에 지쳐서 구경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렇게 여성농악단은 사라져갔다.
여성농악단의 인기가 시들해질 무렵 미국으로부터 초청공연을 부탁받은 정부는 각 지역의 소문난 농악꾼들을 모아 국가대표급 농악단을 구성하고 서울비원에서 한 달간의 합숙훈련을 받게 하였다. 하지만 미국공연은 급작스레 취소되고 말았다. 서운한 단원들은 그냥 말 수는 없으니 서울시민회관을 빌려서 신나게 한 판 놀고나 흩어지자며 결의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그때 지금의 나금추 부포놀음과 꽹과리가 다듬어졌다. 그 후 전주에 있는 도립국악원에 적을 두고서 이곳저곳을 다니며 농악을 가르치며 생활을 하다가 85년 이리농악단의 상쇠로 출전한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과 개인연기상을 수상하며 화려한 주목을 받았다.
 가난한 예술가의 삶이 다 그러하듯 형제를 등지고 뛰쳐나올 만큼 좋아했던 풍물이었고 누구에게도 실력 면에서 뒤지지 않았지만 일상에서의 삶은 고달팠다. 운전이 직업이었던 남편은 함께한 마지막 5년을 병상에서 보냈다. 5년 병수발에 가산은 거덜 나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으나 병명도 알지 못한 채 떠나보냈다. 남편은 “내 주머니에 당신을 넣고 가지 못해 아쉽네”라며 이별의 인사를 했다. 다행히 2남1녀의 자녀들은 공부를 잘해 교사가 된 큰 딸은 일찍부터 스스로 제 앞가림을 하여 걱정이 없었다. 큰 아들인 둘째는 연세대를 시험 본다고 해서 없는 살림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시험에 떨어지기를 기도하는 부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덜컥 합격증을 내미는 아들에게 어미는 눈물로 미안함을 표했다.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그 소망을 돕는다’라고 했다. 막막하던 등록금은 때마침 예술인을 위한 문화상을 받게 되어 그 상금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그 후 부안농악 상쇠기능보유자로 지정을 받고 전주와 부안을 오가다 10년 전 행안 지석리(괸돌)에 자리를 잡았다. 더 늦기 전에 부안농악을 제대로 전수해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빴다. 자녀들은 주름살 깊어진 엄마를 볼 때마다 “이제 그만두세요”라고 한다. 하지만 나금추씨는 스승님 살아생전에 하나라로 더 배우려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바라보는 제자들을 두고서 혼자 편안함을 생각하지 않는다. 부안우도농악보존회와 그 안에 소속되어있는 “바람꽃”같은 든든한 제자들이 있어 행복하다는 나금추선생, 올 가을에도 멋지고 신명나는 한 판을 기대해 보면서 오랫동안 우리 곁에 함께 있기를 기원한다. 공연은 11월 15일(토) 7시 부안예술회관에서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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