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악기장 박경호

   
▲ 창작바이올린2011-B
깊어가는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든 도심 공원에서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수제 현악기를 누구나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행사가 열린다. 현악기장 박경호 작품 체험전. 10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나무에 새긴 선율’이라는 주제로 서울숲 커뮤니티센터에서 열리는 이 행사에는 박경호 씨가 손으로 깎은 현악기 작품 가운데 20여 점이 전시된다. 더불어 전시 기간에는 ‘제작자와의 대화’ 및 ‘현악기 제작 과정 체험’, ‘즉석 연주 및 시연회’, ‘개인 현악기 무료 점검’ 등 다채로운 이벤트도 함께 진행되며, 현악기 작품별 제작 스토리가 담긴 ‘작품집’도 발간된다. 개관은 매일 오전11시부터 오후6시까지.
박경호 씨는 전북 부안 출생으로, 2002년에 이탈리아 굽비오 악기제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귀국하여 지금까지 현악기 제작에 전념해왔다. 지금은 전북 부안에 거주하면서 낮에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해결하고, 밤에는 자신이 지은 황토집 2층 작업실에서 현악기를 깎고 있다. 한편 몇 해 전부터 그는 천편일률적인 현악기 모형에 따분함을 느낀 나머지 세상에 없는 새로운 악기를 만드는 일에 도전해왔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소리가 있다”고 믿는 그는 달과 별, 석탑 등 자연과 사물의 다양한 이미지를 악기 제작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 세계 최초의 창작 악기 제작 실험이다.
   
▲ 창작바이올린2011-A
현악기장 박경호의 눈은 나무를 깎는 칼끝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분단된 한반도’, ‘노동자의 노래’ 등
   
▲ 창작바이올린2014-한반도
의 작품을 통해 우리 시대의 메시지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이름과 스토리가 있다. 더불어 박경호 씨는 “소리는 어느 특정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니다.”라고 강변한다. 자신의 땀으로 빚은 현악기 작품 또한 특정 개인에게 소장되는 것보다는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공공 예술재가 되기를 바란다. 이번 작품체험전도 이러한 그의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국내에서는 드물게, 잇속에 휘둘리지 않고 현악기 제작에만 전념해온 박경호 씨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 시대에 살아있는 장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편 이번 체험전은 박경호 씨 자신보다도 페이스북을 통해 교류하는 그의 친구들이 먼저 나서서 준비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삶의 전부를 던져 장인의 길을 걷는 박경호 씨의 태도에 감명을 받은 그의 친구들은 올해 봄부터 수차례 SNS를 통해 의견을 교환하고, 때로는 직접 만나면서 행사를 추진해왔다. 더구나 이 소식을 접한 서울특별시 공원문화팀에서는 서울숲공원에 무료로 전시 공간을 마련해주었다. 또한 전시준비에 필요한 비용도 페이스북 친구들이 십시일반으로 마련했다. 이 행사는 SNS 커뮤니티와 지방자치단체가 함께 일구어낸 예술문화 성과로 기록될 것이며, 일반 시민에게 수제 현악기의 아름다운 빛깔과 선율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주목받고 있다.

 

현악기장 박경호는 누구?


현악기장 박경호는 1970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20대에는 패션 업계에 종사했다. 그러던 1999년에 이탈리아에 건너가서 피렌체 패션학교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우연히 이탈리아 굽비오 악기 제작학교를 견학하던 중, 나무 향기에 취하여 현악기 제작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해 가을 굽비오 악기제작학교의 현악기 제작과 활 제작 전공 입학시험을 보았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즉흥적으로 응시한 터여서 합격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손재주와 솟구치는 열정 덕분에 그는, 비록 꼴찌 성적이지만 입학을 허가받았다.
굽비오 악기제작학교 한국인 1호 유학생이 된 그는 이탈리아 명장들의 지도를 받으며 등 현악기와 활 제작 공부에 혼신을 다했다. 그리고 2002년 9월 디플로마 시험에서는 시험관 7명 전원에게서 실기점수 만점

   
▲ 악기제작에 몰두하고 있는 현악기장 박경호씨 사진 / 사진작가 박남일 제공
을 받았다. 비록 입학시험 성적은 꼴찌였으나, 졸업시험에서는 유럽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했다.
2003년 귀국 뒤 그는 서울 방배동에서 ‘경호 파크 현악연구소’를 운영하며 현악기 제작에 몰두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악기 제작에만 전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악기 제작자들은 오래된 악기 수리를 해주며 생계를 이어가느라 그들의 연장은 녹이 슬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악기 수리공’이 되기를 거부하며 오직 제작만을 고집했다. 덕분에 생활은 날로 곤궁해졌다. 그래서 2004년에는 면목동 집 근처 작은 공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편 그 무렵에는 현악기 제작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이 한 해 스무 명 가량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작품 제작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모두 돌려보냈다. 그러다보니 작업실 임대료마저 밀리기 일쑤였다. 결국 그는 공사 현장에 가서 날품을 팔아 입에 풀칠을 하면서 제작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2007년에는. 9대째 조상대대로 살아온 전북 부안 시골마을로 내려가, 홀로 계신 어머니가 여생을 보낼 집을 지었다. 도중에 잠깐 매형의 도움을 받은 것 말고는 온전히 혼자서 무려 2년이나 걸려 2층 황토집을 완성했다. 그런 뒤 서울로 와서 방배동에 있는 친구의 작업실 한 구석을 빌려 작품 활동을 재개했고, 2011년 봄에는 ‘시카고악기사’ 주최로 예술의 전당 로비에서 열린 현악기 전시회에 출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했다. 그해 가을 방배동 공방에서 철수한 박경호는, 아내와 아들을 서울에 남겨둔 채 시골로 내려가 황토집 2층을 작업실로 개조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부안 황토집에 머물며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조명 아래서 작품을 깎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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