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과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가.
‘진상규명’이라는 간명한 요구로부터 출발한 세월호특별법의 표류는 진정성 없는 ‘무늬만 야당’의 실체와 세월호 유족을 마치 딴 나라사람 취급하는 대통령과 여당의 후안무치를 확인해 줄 뿐이다. ‘신드롬’이라 불러 부족하지 않을 프란치스코 교황의 닷새간의 방한에서 벅찬 감동을 느꼈던 것도, 영화 ‘명량’을 단숨에 흥행영화 1위에 올려놓은 것도 어쩌면 침몰해 가는 대한민국호를 구해줄 새로운 선장에 대한 목마름은 아니었을까?
일명 ‘기레기’라는 모욕적인 언사에도 그 흔한 변명 한마디 내놓을 수 없었던 우리 언론의 민낯은 어떤가. 4박 5일 일정으로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인 닷새간의 탈권위주의적 행보를 전하는 지금도, ‘기레기언론’은 여전하다. 15일 교황은 ‘세월호 십자가 순례단’ 유가족을 만났고, 16일 광화문 카퍼레이드 중 단식 34일째를 맞은 유민아빠를 만나 깊은 위로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만남은 유가족의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향한 절박한 호소를 전 세계에 알리게 했고, ‘제대로 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레기언론’이었다. 교황 방한관련 보도를 모니터한 민언련은 유민아빠의 특별법 제정 호소를 잘라버린 채 “잊어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세월호”만을 남긴 MBC의 비겁한 편집과 조선일보, 중앙일보와 마찬가지로 유민아빠와 교황의 만남을 외면한 YTN의 외눈박이 편성을 고발한다. 
미국 사회학자 윌리엄 오그번(William F. Ogburn)은 ‘광의의 문화 요소들 사이에 변화의 속도가 달라 그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현상’을 가리켜 ‘문화지체’(cultural lag)라 명명했다. 강준만(2014,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인물과사상사. p.26~33)은 이를 ‘문화의 비물질적인 측면들이 문화의 물질적인 측면들의 발달에 뒤떨어지는 현상’이라고 요약하면서, 특히 동양과 서양의 만남은 동양권 나라들에 물질문화와 정신문화 사이에 문화지체를 야기했고, 한국은 ‘문화지체’에 ‘역사지체’까지 가세했는데, 압축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독재체제가 인위적으로 특정부문(정치)은 억누르고 특정부문(경제)은 키웠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았어도 발생했을 ‘문화지체’가 훨씬 더 증폭된 형태로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문화지체’와 ‘역사지체’는 최근 몇 년, 보수정권의 집권과정에서 그 실체가 더욱 두드러진다. 세월호 참사는 그래서 어쩌면 예견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박홍규는 한겨레신문(2014.5.9.)에 쓴 「나를 용서하지 마라」에서 “나를 용서하지 마라. 대한민국은 그런 자들의, 그런 자들을 위한, 그런 자들에 의한 나라다. 그런 자들이 이 나라의 뺑소니 선장이고 선원들이다. 돈에 미친 자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니 국민들도 모두 돈에 미쳐 돈에 미친 배를 타고 다니다가 그 돈의 미친 무게에 뒤집어졌다. 오로지 돈의, 돈에 의한, 돈을 위한 돈 나라다”라고 한탄했다.
어쩌면 세월호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체계’속에 숨겨버린 ‘나의 욕망’은 아닐까? 썩어빠진 정치와 언론 등 ‘체계’에 대한 목소리는 있어도, 정작 그 그늘에 감춰버린 ‘나의 욕망’은 언제나 예외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는 세월호 이후의 대한민국을 말할 수 있을까? 거대담론 속에 감춰왔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욕망을 직시할 때다. 박홍규의 말마따나 세월호 이전의 대한민국은 “돈에 미친 자들이 이 나라의 지도자니 국민들도 모두 돈에 미쳐 돈에 미친 배를 타고 다니다가 그 돈의 미친 무게에 뒤집어”진 침몰해가는 난파선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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