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가 침몰했다. 그로 해서 어린 학생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겨울나무의 낙엽처럼 사위었다. 참혹함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한국 사회 또한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저갱으로 침몰하고 빠져들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 느낌은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공감은 때로 부정적이고 때로 긍정적으로 나타난다. 긍정의 공감은 공감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 부정의 공감은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우울증에 빠뜨린다. 그런데 세월호의 침몰은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부정의 공감 작용으로 해서 한국 사회 전체는 깊은 우울로 빠져들고 있다.
우리를 깊은 우울로 떠밀고 있는 것은 세월호 참사만이 아니다. 올해만 해도 많은 대학생들이 눈 더미에 깔려서 세상을 떠났고 해병대 캠프에 참가했던 아이들도 끝내 다시 숨 쉬지 못했으며 요양병원에서는 화재로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다. 눈에 깔려서 죽고, 물에 빠져서 죽고 불에 타서 죽었다. 다음에는 또 무엇일까? 이래서야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우울증이 지속되면 무기력증이 뒤따라온다.
누적된 비극으로 인해 깊어진 우울증은 그 속성 때문에 반드시 히스테리를 닮은 조증을 동반하는데 그래서 그 조증에 원한과 분노가 뒤섞이게 마련이고 그것이 자기파괴나 주위의 관계를 파괴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쉽다. 우리 사회가 거칠어지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는 이면에는 이런 우울증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무슨 일이든 그렇지만 원인을 알아야 병을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병이 쉽게 치유되지 않고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은 그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처해 있는 문제의 원인이 매우 복잡한 것도 사실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알렉산드로스 왕이 동방원정 중에 프리기아 지방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른 것처럼 단칼에 잘라서 해결하거나 인내심과 시간을 갖고 꼼꼼하게 하나씩 풀어내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방법이 두 가지라고 하지만 사실은 한 가지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후자의 방법을 시도했기 때문에 전자의 방법이 가능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먼저 인내심을 갖고 우리 사회에 산적해 있는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야 한다. 그리고 언젠가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때를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할 것이다. 《장자》의 〈소요편〉에 깊은 물속에 산다는 곤이라는 물고기의 이야기가 나온다. 오랫동안 깊은 물속에 살던 곤이 수면으로 나오면 붕이라는 거대한 새가 되고 날개짓 한번으로 수천리를 날아간다고 한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 빗대면 오랫동안 고민하고 애를 쓰다보면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먼저 세월호 참사라는 말 대신에 4.16참사라는 말을 써야 할 것이다. 세월호는 비극의 상징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매번 새로운 것으로 되풀이 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이 잊히지 않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기호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4.16참사라는 말이 더 효과적이다. 미국에서 무역센터 테러라고 부르지 않고 9.11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그와 짝을 이루는 날아오른다는 것이 있기에 의미를 갖는다. 가라앉고 잊히면 그 가라앉음은 의미를 상실한다. 날아오를 때 가라앉음이 지닌 의미가 생긴다. 그렇기에 침몰의 의미를 찾기 위해 인내심을 갖고 비상(飛上)의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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