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전의 일이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오래 전 일이어서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간첩단 사건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기억할 수도 없을 법하다. 그러나 울릉도간첩단사건은 우리 전북지역 사람들이 대거 연루되었기에 40년이 흘렀지만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세월의 물결에 침식이 되어 기억창고 안쪽 깊숙이 처박혔던 울릉도간첩단사건이 40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6~70년대에는 툭하면 간첩단 사건이 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나왔었다. 특히 선거가 임박하거나 독재정부가 곤경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OO간첩단 일망타진’이란 제목의 기사가 대서특필했다. 심지어는 이때쯤 간첩단 사건이 터질 텐데 예상하면 어김없이 ‘중앙정보부’의 발표가 있었을 정도였다. 1964년 발표한 1차 인혁당사건과 1967년 동백림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1974년 4월 민청학련사건, 그보다 약 20일 전인 3월 15일 발표한 인혁당재건위(2차 인혁당)사건과 그해 1월 발표한 울릉도간첩단사건은 박정희의 영구집권 야욕인 유신쿠테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억누르려고 연달아 조작됐다. 간첩조작은 조작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사법살인으로 이어졌다. 2차 인혁당사건은 법원 판결이 난지 18시간 만에 8명에게 사형을 집행했다. 울릉도간첩단사건 역시 3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조작간첩사건들은 최근에 대부분 무죄로 판명이 났으니 이 억울한 죽음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단 말인가.
울릉도간첩단사건은 박정희 독재정권의 충견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앙정보부가 납북어부와 그 가족 등 울릉도 주민과 당시 전북대 교무처장이었던 이모교수 등 47명을 불법으로 연행해 지하밀실에 가두고 온갖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간첩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전북대 이교수 외에도 민주공화당 전북지역 간부가 연루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었다. 중앙정보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울릉도 주민과 전북 인물을 하나로 묶어 극적인 효과를 노렸다. 무기징역을 언도 받은 이교수는 17년 동안 옥살이를 했으나 2012년 말 간첩죄에 대해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사건이 발생한지 40년 만인 지난 1월과 2월에도 재심법원은 나머지 관련자들의 간첩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늦었으나 그나마 다행이지만 이들이 그동안 겪은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10년 형을 받았던 여인이 있다. 남편과 오빠는 간첩이 되었다. 이 여인의 불행은 본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간첩조작의 여파는 자식으로 이어졌다. 부모가 모두 수감되어 고아 아닌 고아로 자란 아들은 간첩의 자식이라 하여 사랑하는 여인의 집으로부터 결혼을 허락받지 못했다.
공권력에 의한 간첩조작사건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시청 공무원이자 탈북화교인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조작이 대표적인 사례다. 꼭 간첩조작이 아니어도 공안사건 조작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최근에 무죄 판결이 난 강기훈 유서대필사건도 그중 하나다. 외국에서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 120년전 프랑스에서 드레퓌스사건이 일어났다. 군부와 보수언론이 하나가 되어 무고한 드레퓌스를 간첩으로 몰아 감옥에 보냈다. 진짜 간첩인 에스테라지 소령은 오히려 은폐되고 보호 받았다. 사건 발생 12년 만인 1906년 드레퓌스는 무죄가 확정되고 군대에 복귀했다. 1950년부터 1954년까지 미국에서 진행되었던 메카시선풍도 비슷한 사례다. 외국에서 120년 전 또는 60년 전에 일어났던 정신착란적 간첩조작이 이 나라에서는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40년 전 울릉도간첩단사건 피해자들은 지금도 김근태기념치유센터에서 악몽을 떨쳐내기 위해 치유과정을 밟고 있다. 이들의 기구한 운명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보듬고자 김제출신 소리꾼 임진택이 이들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었다. 연극 “상처꽃 울릉도1974”가 4월 3일 대학로에서 공연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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