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변호인’이 천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고 막을 내렸다. 그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영화 하나로 눈가를 적시며 감동을 받고 분개도 하고 공감도 했을 것이다. 주변 얘기를 들어보면 두 번 세 번 본 사람도 적지 않다. 그리고는 마치 자기 일처럼 주위사람들에게 관람을 권했다. 어쩌면 관객 천만을 넘기는 것으로 모자라 한 이천만 쯤 영화사에 남을 대기록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영화도 막을 내렸고 ‘열광’도 어느 정도 숨이 죽었으니 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자. 영화 자체의 완성도로만 보자면 변호인은 지극히 범작이다. 내러티브나 테크닉 어느 부분에서도 새로운 것은 없었다. 장르영화의 규범을 잘 따랐고 배급도 와이드 릴리즈(대규모 동시개봉)방식의 상업적 유통방식에 충실했다. 이 전략은 매우 잘 맞아 떨어져서 제작자와 배급사는 대박을 터트렸다. 관객의 충성도가 곧 수익으로 연결됐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범상한 영화를 관객이 특별하게 대우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특별했을까. 매우 주관적인 관점에서 유추해보면, 사람들은 이른바 ‘변호인현상’을 통해 권력자들에게, 또 자본가들에게, 자, 봐라, 우리 시민은 아직 깨어있다, 라고 웅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또는 자신의 순수했던 학창시절을 반추하며 나도 한때는 사회변혁을 위해 몸 바쳤었지, 라며 현재의 답답한 현실에 침묵하고 있는 자신을 합리화하려 했을지도 모르고.
정답 아니라는 것 잘 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있다. 레닌은 “영화야말로 가장 강력한 선전선동의 도구”라고 했다. 더구나 변호인처럼 권력자들이 보기에 불경스러운 영화는 곧바로 시민행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일베’들이 개봉도 하기 전에 그렇게 난리를 피운 것이다. 그런데 변호인은 결과적으로 어떤 행동으로도 연결되지 않았다. 스크린을 마주하고 눈물을 흘리며 분개했지만 영화관을 나온 관객은 곧바로 일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오히려 개운한 마음으로.
그러니까 변호인은 카타르시스였고 관객욕구를 대리충족 시켰으며 뭔가 꺼림칙한 양심의 찌꺼기를 씻어내는 눈물이었다. 선전선동의 도구로 작용하기는커녕 사회변혁의 아주 작은 동력 노릇도 하지 못했다.
이 점에서 영화 ‘천안함의 진실’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천안함의 진실’은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개봉 몇일 만에 간판을 내렸고, 사람들이 열광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권력은 두 영화를 왜 다르게 취급했을까? 바로 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정권이 두려워하는 것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지 감동적인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변호인은 어떤 제한도 없이 상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히려 이런 사정을 이미 꿰뚫고 있는, 권력에 빌붙어 콩고물을 주워 먹고 사는 노회한 책사는 변호인을 보려고 장사진을 이룬 순진한 관객의 행렬을 바라보며 어둠 속에서 음습한 미소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안철수를 보자. 새정치를 하겠다던 그는 합당선언 전까지도 새정치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설명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지금에 와서 ‘구태정치’의 한 축인 민주당과 손을 잡았다. 합당의 이유 역시 새정치였는데, 아직도 무공천 말고는 뚜렷한 새정치의 내용이 잡히지 않는다. 안철수의 말대로라면 새누리당도 무공천을 하면 새정치를 하는 것이고 그들과도 손잡을 수 있다는 논리로 읽힌다.
이쯤에서 안철수의 새정치에 ‘변호인’이 오버랩된다. 영화가 불의에 항거하는 노무현을 담고 있지만 사람들은 대리만족에 그치고 결국은 제작자와 배급사만 거액을 챙겼듯이, 안철수의 새정치 역시 대중의 시원한 부분을 긁어주는 듯 했으나 별 내용은 없으며, 종국에는 안철수 자신이 최대의 수혜자일 뿐 정작 새정치의 혜택을 누려야 할 국민은 약간의 카타르시스에 만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변호인’의 반대편에서 ‘천안함의 진실’이 소리 없이 스러져 갔듯이, 안철수의 뒤편 어딘가에 국민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진짜 새정치의 주인공이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목 놓아 울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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