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년 새아침이 밝았다.
오늘 아침, 나는 집 근처 호숫가로 나와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새해를 맞이했다. 애초에 원대한 포부나 거창한 계획이 없었으니 새로운 각오와 다짐 따위도 물론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그러나 무덤덤한 주인과는 달리 내 손전화는 몹시 바쁘다. 연하장을 대신하는 문자가 연달아 들어온다.  하나같이 ‘희망 찬 새해를 맞아’로 시작해서 ‘행운과 건강 그리고 사업 번창’을 기원하는 내용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너무 식상해서인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근래에 들어서 연하 문자는 희망이 주류다. 현실은 썩 희망적이지 않아 보이는데 그럴수록 희망이란 단어가 더 필요한 모양이다. 실망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이 더욱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갑오년 새날이 왔다.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그 갑오년이 다시 왔다. ‘사람이 곧 하늘이니, 양반 상놈의 구분이 어찌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것이더냐? 하늘 아래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난다.’ 인내천과 평등사상을 내걸고 동학도들이 일어났다. 갑오년 벽두에 동학 농민군이 평등세상을 희망하며 죽창을 들고 모였다.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 백산면에 모여 대오를 정한 뒤 전주성으로 진군했다. 당시 권력집단에서는 민중봉기의 의미를 축소하고자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 원인이라 매도했다. 더 나아가 조선왕조를 무너뜨리려는 내란으로 왜곡했다. 분명히 못을 박아 두지만 갑오년의 농민전쟁은 외세를 등에 업고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어 백성들을 편안케하며, 조선왕조를 외세와 간신 매국노로부터 보호할 목적으로 일어났다. 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장군은 처음부터 보국안민을 봉기 목적으로 표방했다.
갑오농민전쟁이 전라북도에서 일어난 것은 단순히 우연으로 넘길 일이 아니다. 조병갑 같은 탐관오리는 전국 어느 고을에나 널려 있었다.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기 300여 년 전, 전북에는 정여립이 있었다. 정여립은 고향인 전주로 내려와 대동계를 결성했다. 기록에 보면 양반과 상인, 천민까지 한자리에 모여 대동계를 결성한 뒤 대등한 인격으로 서로 존중하며 교류했다고 한다. 대동은 구동존이, 즉 구대동존소이에서 따온 말이다. 평등과 소통의 열린 사상이다. 또한 정여립은 ‘천하는 공물’이라 주장했다. 이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 아니고 백성들이란 말이니 왕정시대에는 단연코 역적의 말이었다. 그러나 요즘 말로 하면 공화제를 주장한 것이니 영국에서 공화제를 처음 주장한 크롬웰보다 30여 년이 앞선다. 정여립은 훗날 역적으로 몰려 의문의 죽음을 맞으며, 이와 관련해 호남지역 선비 천여 명이 학살당한다. 1980년 광주항쟁과 닿아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여립의 대동사상과 민주공화사상이 우리 전북지역 민중의 뇌리에 각인되어 전해왔기에 갑오농민전쟁의 단초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갑오년 새날의 희망은 평등과 민주다.

갑오년 새해 첫날이 저물어간다.
설날에 뜨고 지는 해가 나머지 일 년 삼백예순다섯 날의 해와 다르지 않다. 다만 해를 쳐다보는 사람의 마음이 다를 뿐이다. 과거와 미래를 이어주는 현재는 항상 그대로다. 시간의 흐름 속에 인간이 세워놓은 이정표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2014년이 시작됐다. 우리는 항상 어제보다 나은 오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꾼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보다 나은 세상이 되기를 꿈꾼다. 새해에는 작년보다 복도 더 많이 받기를 서로 축원한다. 복을 많이 받으려면 복 받을 일을 많이 하면 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법이다.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누우면 웃음거리가 되듯이 공짜 복을 원하는 사람은 원하는 복을 얻지 못한다. 감나무에 오르든지, 감나무를 흔들어야 감을 먹을 수 있다. 갑오년 새날도 농민들이 죽창 들고 싸워서 얻었다. 포기하지 말자. 저 고개 너머에 희망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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