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안.녕.하.지 못합니다
처음 고려대 주현우 학생의 대자보를 봤을 때는 사실 큰 감흥이 없었습니다. 답답한 사회, 굳어버린 대학에서 한 학생의 작은 외침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다친 사람, 갇힌 사람, 죽어가는 사람들이 수두룩한데도 이토록 무관심한 세상에서 그 정도 목소리에 몇 명이나 화답할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대자보에 다시 대자보로, 학교를 넘어 지역을 넘어 퍼져나가는 그 메아리들을 보며 뼈아프게 반성했습니다. 그 작은 외침에 내가 먼저 답할 생각은 하지 못할망정 건방지게 재단하고 평가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제 전국에서 울리고 있는 당신들의 목소리에 저도 답하고 싶습니다. 대자보 대신 제게 주어진 이 지면이 당신들의 질문에 답할 공간이 아닌가합니다.
안녕들하시냐고 물으셨지요. 저는 그 질문에 바로 답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안.녕.하.지 못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흐르는 대로 몸을 맡겨 살아왔습니다. 내 앞가림도 못하는데 남의 일에 무슨 참견을 하랴, 오지랖부리지 말고 소시민으로 살아가자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세월동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더군요. 관심을 갖지 말자 하다가도 뉴스에, 인터넷에, 신문에서 새어오는 소식마저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김어준이 말했었지요. “내 생활의 스트레스의 근원은 정치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데 나날이 이상해지는 세상은 정말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무덤 속의 독재자들이 되살아나고,  5·18은 폭동이 되고, 일제시대는 근대화의 기원으로 재평가 받는 세상. 참교육을 외치던 교육자들이 종북세뇌를 시키는 빨갱이가 되고, 공중파 방송사가 수십일 동안 파업을 하고, 수십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끊으며 절규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세상. 여성·지역·소수자에 대한 차별은 갈수록 노골적이 되고, 강자의 책임은 묻지 않고 약자의 무능력함에만 낙인을 찍는 세상. 그 와중에 녹생성장, 창조경제, 의미를 알 수 없는 말들만이 잔치를 벌이고 있는 2013년의 대한민국을 대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요. 정말이지 당신들이 인용한 노래가사 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미친 세상에…”(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중에서) 일상에서는 부족한 내 능력과 불안정한 미래가 날카로운 칼처럼 가슴을 베고, 잠시나마 세상을 둘러보자면 비상식이 상식이 된 이 나라의 모습이 무거운 망치처럼 머리를 내려쳤습니다. 이 미친 세상에서 살려면 저도 미쳐야 할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얼 했냐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는 투사처럼 목소리를 높여 굳은 돌이 된 걱처럼 보이는 후배들을 탓했습니다. 조금 더 취기가 오르면, 얼른 이 나라를 떠야 한다고 푸념을 내뱉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불편한 것을 외면하고 싶어지고, 상처를 받을수록 내 안에만 갇혀지냈습니다. 마치 나만, 내 주변만 이 미친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양 문을 닫고 살았습니다. 그 너머로 손을 내밀지도 소리치지도 않았으면서.
당신들의 안녕하지 못한 대자보들을 읽고 한참동안 다른 일을 손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을 때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이 빨개졌습니다. 너무나 부끄럽고,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소싯적에 종종 집회도 다녀보고, 발언도 들어봤지만 이런 심정은 처음이었습니다. 집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개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같았습니다. 누가 어떤 마음으로, 어떤 생각으로 이 자리에서 나오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요. 대자보로 만나는 당신들은 하나하나 너무나 영롱하게 빛을 내는 아름다운 보석이었습니다. 전에는 왜 미쳐 몰랐을까요? 아마도 제가 스스로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겠죠. 당신들이 손을 내밀어준 덕분에 그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리는 갇혀있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그게 당신들에 제게 준 가장 큰 위로입니다.
대자보 몇 장이 세상을 바꿀까요? 집회와 시위를 나가면 바로 나라가 뒤집힐까요? 아마도 아닐겁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운동이, 새로운 힘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확신합니다. 안녕하지 못한 당신들 덕분에 저는 잠시 안녕했습니다. 이제 저도 당신들과 함께 저 너머의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전하려 합니다.
부안독립신문 독자 여러분 안녕들하십니까? 하 수상한 세월에 정말 아무탈 없이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지 않으시다면 그렇다고 소리라도 한번 크게 질러보십시오. 저 멀리서 응답하는 메아리들이 여러분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해줄 겁니다. 지금은, 당장은, 그 걸로도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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