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재흠 (우리밀영농조합법인 상임이사, 본보 편집인)
아주 오래된 얘기다. 20년쯤 전이다. 새내기 농사꾼으로 한창 일을 배우고 있을 때였다. 봄일이 시작될 무렵의 어느날 아침 옆동네에 사시는 지인의 연락을 받았다. 혼자 사시는 여자분인데 정화조를 묻으려고 전날 집안에 구덩이을 파놓았단다. 밤에 소나기가 많이 내려 구덩이에 물이 흘러들어가 앉혀 놓은 정화조가 둥둥 떠올랐다. 물을 퍼 내야 하겠는데 방법이 없어 연락을 했다고 하신다. 부랴부랴 경운기 시동을 걸고 댁으로 갔다.
경운기 압축기를 연결하고 물을 품으려는데, 어라! 흡입호스가 구멍이 나서 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끊어 내고 새로 끼우고 테이프로 감고 해서 다시 경운기를 돌리는데 영 물이 올라오지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니 압축기 본체에 금이 가 있었다. 겨울동안 얼어서 터져 있었던 모양이다. 역시 새내기 어설픈 농사꾼이었다. 도와드리려고 왔는데 당장 방법이 보이질 않는다.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는데 변산에서 시를 쓰시는 형님이 오셨다. 다급한 마음에 형님에게도 연락을 해 두셨던 모양이다. 형님 손에는 양동이와 물장화가 들려 있었다. 물장화를 신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더니 양동이로 물을 퍼내기 시작한다. 나는 밖에서 양동이를 받아 물이 다시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멀리 내버렸다. 삼십분 남짓 지났을까 어느새 구덩이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물까지 깨끗이 비워내고는 구덩이에서 나온 형님은 “막고 품는 것이 젤이여”라며 막걸리 한 잔을 들이켰다.
이 일은 그 이후 농사를 지으면서 중요한 순간마다 판단의 기준이 되었던 ‘정신적 사건’같은 것이었다. 포크레인을 대야 할 것처럼 보이던 일도 일단 삽질을 시작하면 의외로 손쉽게 끝났다. 트럭을 가까이 대려다가 빠지느니 어깨로 몇 번 더 날라버리면 그것이 더 빠른 일이었다. 때로 편법이나 잔머리를 굴리려다가도 이 일이 떠오르면 ‘원칙을 지키고 우직하게 가는 것이 훨씬 빠른 길’이라는 생각을 되새기며 더 원칙을 지키고자 애쓰게 되었다.
더 많이, 더 빨리 하려다가 한걸음도 못가고 뒷걸음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기계가 고장나고, 때로는 반칙이 칼날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 처음에 먹었던 진정한 마음은 사라져 버리고 흐트러져버린 일을 수습하느라 진을 다 빼다가 한참을 후퇴한다.
지금 부안군민들은 군수의 구속이라는 또 한 번의 가슴 아픈 사건을 겪고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 견뎌내야 할 감옥생활은 더욱 가슴 아프다. 안타깝게도 부안의 역대 군수들 중 명예롭게 임기를 마친 분이 별로 없다. 나는 그 분들의 선의를 믿고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과정의 잘못을 거치면서 처음에 먹었던 마음이 훼손되고, 더 큰 대의가 실종되는 모습을 보면서 원칙과 기본에 충실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부안의 발전, 중앙정부로부터 많은 투자를 유치하는 일, 내 마음에 들게 직원을 배치하는 일 등등, 매우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의 순서가 바뀌고 마음이 현실을 앞서가고, 작은 편법이 동원되면서 그 중요한 일들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흐트러져 버렸다. 시대를 꿰뚫는 정신과 미래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 부족한 것도 원인이다. 그 과정을 거치며 부안발전을 위한 방향도, 모아진 주민의 마음도 함께 실종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작은 토론을 제안한다. 부안의 미래를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작은 논의들이 필요하다. 모터를 대고, 양수기를 대고, 포크레인을 대서 한 번에 해결하려하기보다, 한 양동이씩 한 양동이씩, 한 삽씩 한 삽씩, 차분하고 원칙적으로 필요한 일과 방법에 대해 논의를 모아야 할 일이다. 그 길이 훨씬 빠를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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