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공동체, 통합만이 살길이다.
대한민국은 불통공화국이다

새 정부 출범 초부터 정부조직 개편안을 놓고 대통령과 야당이 힘겨루기를 하면서 국무회의조차 열지 못하는 어이없는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은 자기 신념을 실현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관철의지를 굽히지 않고 야당은 방송의 공정성을 앞세워 절대 안된다면서 서로 불통이라고 상대를 탓할 뿐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먹고 살기 힘든 국민들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야가 명분과 정당성을 내세우지만 그 바닥에 정치적 이익이 있음을 국민들은 다 안다. 불통에 있어서는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지난 십여년간 한국사회의 화두는 단연 ‘소통’이었다. 그만큼 소통이 잘 안되었다는 의미고 소통이 절실해졌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소통은 이제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융합하는 ‘통섭’의 개념으로까지 확대되어 생물학전공자인 서울대 최재천 교수 같은 이는 통섭학을 개설할 것을 주장한다. 학자들은 불통의 원인이 우리 정치의 고질적인 병폐라 할 수 있는 승자독식주의에 있다고 의견을 모은다.
승자독식주의는 필연적으로 집단 편가르기를 낳을 수밖에 없다. 집단 편가르기의 이념 형태는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에게 어느 한편에 소속되기를 강요한다. 국민들도 지도자와 권력자들의 소통능력을 질타하면서도 매사를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이분법에 익숙해져 있다.
승자독식주의의 뿌리는 유교담론을 국시로 했던 조선조라 할 수 있지만 6.25전쟁, 반독재투쟁을 거치는 동안 집단 패거리 문화를 고착시켜 한국 사회의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노무현 정권의 코드인사, 이명박 정권의 고소영 내각이 승자독식주의의 전형이다. 승자독식주의는 정의와 국익을 명분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가치와 이익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소통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을 아예 거부한다. 지난 정권들을 통해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맞아죽을 소리 한번 하겠다
부안사회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도 불통이지만 우리 부안공동체 또한 대화와 소통이 불가능한 사회다.
올바르고 제대로 된 여론이 형성될 수 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결론적으로 핵폐기장 찬·반 대치 상황이 그 원인이라고 본다.
찬·반 양진영의 집단 편 가르기 대결 양상은 이미 십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강철같이 굳어져 버렸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간다는 식이다.
오직 찬·반 양진영의 승패에만 관심 있을 뿐 해결논의조차 자리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냉정하게 부안사회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해결방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은가.
찬·반 양진영의 각 집단과 집단내의 소그룹까지 분석해 보기로 한다. 물론 내 나름의 아전인수식 진단과 분석일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찬성진영은 대체로 단순하지만 느슨한 연대 형태의 반대진영은 다소 복잡하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
며칠전 지인이 내게 한 말이다. “그 사람이 또 나온데요. 큰일이네요. 우리가 얼마나 피해 봤습니까? 마지막으로 한번더 뭉쳐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투경찰에게 얻어맞고 수많은 날들을 길거리에서 고생하고 감옥가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장애를 겪고 있잖습니까. 회장님도 피해자지요.” 그는 반대파다.
나는 그의 말을 ‘피해자’, ‘뭉쳐서 이겨야’로 요약할 수 있고 반대진영 집단사고의 시각으로 파악한다.
집단사고란 비슷한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똑같은 방향으로만 생각을 모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앨리어트 애런슨은 집단사고란 사람들이 응집력이 강한 집단속에서 공통적 추구가 너무 강해 행위의 대안적 과정의 현실적 평가를 할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집단사고는 외부의 적을 향해서만 모든 관심과 에너지를 집중시키고 이념의 패거리가 되어 문제 해결을 외면하고 어렵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자기 정당성을 확신하는 집단일수록 상대를 향해서 일방적인 소통과 항복을 요구하기도 한다.
바로 우리 부안이 찬·반 양진영의 이러한 집단사고에 빠져 있는 것이다.
먼저 반대진영부터 보기로 한다.
반대진영은 자신들이 개혁·진보 세력임을 확신한다. 그들은 몇 갈래 조직을 꾸리고 있기도 하지만 느슨한 연대 형태로 집단의 동의와 공감대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의식의 공동체화가 강해 사고의 경직과 자유로운 의견제시가 어려운 점이 있다. 앞서 말한 지인의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 맞다. 분명 우리는 피해자다. 그런데 김전군수를 통칭하는 찬성진영에게 물어보라.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펄펄 뛴다.
부안사회의 상처를 논하자면 가장 확실한 것은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아주 편리한 이중 기준을 갖고 세상을 살아간다. 남에게 상처를 줄때는 둔감해지고 자신이 상처를 받을 때는 민감해지는 이중 기준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태복음 7장 3절의 말씀이다.

나는 정의와 정당성. 명분이 반대진영에게 더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러나 부안사태 과정에서 목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었다는 상황 논리의 변명만으로 찬성파에게 가해진 폭력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지도부의 의도가 아니고 개념조차 모르는 완장들이 저지른 일이라고 떠넘길 수 있는가.
청소차 불 지르고 찬성 음식점 유리창 깨고 , 이웃에게 침뱉어 모욕주고 떼로 몰려가 위협하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했던 가해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한번이라도 그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 적이 있는가.
정당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공동의 가해자임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반대진영의 한사람으로서 그 현장에 없었다 할지라도 나도 이 책임을 피해갈 수 없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참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또 반대진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명분과 진정성만 있었는가.
라인홀드 니버는 개인의 대의나 공동체에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바칠 때 조차도 권력에의 의지는 여전히 갖고 있다고 정의한다. 반대진영엔 종교인·농민·시민운동그룹도 있었지만 정당정치인과 정치 지망생들이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 당연히 이들은 권력의지를 가질 수밖에 없고 이점에 있어서는 찬성진영 김 전 군수측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예전에 호형호제하며 서로를 아꼈던 후배가 있다.
그는 젊을 때부터 민주화·농민·지방분권운동에 참여해왔던 반대진영 지도부의 일원이었다. 중앙정부와 싸움에서 애로도 많았지만 지도부의 실수도 있었다. 이점을 문화비평가인 부안사람 고길섶은 반대지도부의 소통부재, 형님문화, 권력의지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비판했다. 그 후배의 권력의지는 같은 진영에서부터 먼저 질타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권력의지의 충돌이 부안사회의 괜찮은 사람 여럿을 낙마시킨것도 사실이다. 정치지향적인 사람이 권력의지를 갖는 것이 나쁜 것인가. 나는 꼭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다. 선한 권력의지에 한해서 말이다.
또 제도 정치권을 정치꾼놀이 정도로 비하하고 순수성과 순결성을 자부하는 시민 운동그룹이 있다. 굳이 강남좌파 성향이라고 규정지을수는 없지만 그들은 대체로 고학력·고소득자들로 거금을 쾌척하여 신문과 지역문화잡지를 만들기도 하고 부안미래를 위한 대안 활동에 관심과 열성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의 순수성과 지역사회에 대한 헌신성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존재감에 대한 자기만족, 대중에 대한 우월감이 내재되어 있다면 그것 또한 위선적인 권력의지임을 지적하고 싶다. 정치권력만 권력의지는 아닌 것이다. 지나친 순결성의 과신은 자기반성을 가로막고 관념적 허구에 빠질 위험과 그들만의 소통,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밖에 없다. 지난 세월 신문운영과 잡지 발행, 아카데미 활동 등 많은 노력에도 다수 부안 군민들의 호응을 얻었는지를 돌아보면 내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것이다.
또 한 그룹은 부안의 농민운동·자치운동에 뛰어든 객지출신 활동가들이다. 그들의 부안사회에 대한 공로도 절대 폄하할 수 없다. 그들중 한사람이 내게 푸념한 말이다.
부안사람들과 함께 20년 이상 살았는데도 자신은 부안사람들에게 외부인이다라고. 나는 그에게 유시민에게 붙여진 싸가지의 메시지가 국민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를 말해주고 싶다.
민주화 투쟁시절엔 이념과 인격의 충돌이 있었을 때 이념우위가 먼저 인정 되었지만, 내용과 가치가 아무리 좋아도 오만한 개혁, 건방진 진보는 성공할 수가 없다. 군민은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군민과 함께하는 겸손한 개혁만이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사람이 모인다.
그들은 반대진영의 여론과 전술활동을 주도해왔다. 가치와 이념을 추구하다보니 때론 현직 군수를 곤혹스럽게도 한다. ‘누가 뽑아줬는데’라는 자기 과신과 보상심리가 깔려 있음이다. 그들과 농민운동그룹이 다수 군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심지어 소외되어가는 이유를 그들 자신이 생각해 볼 일이다.
또 한 그룹은 이해관계가 다르지만 여러 그룹이 모여 만든 군민모임이다. 부안의 현안문제도 다루지만 주로 선거때마다 반핵진영의 후보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반대진영의 의견을 대행한다고 볼 수 있다. 현직군수를 지지하지만 속내는 복잡한 것 같다.
또 한 그룹이 있다. 전통적인 보수그룹으로 대체로 사회단체에 관계하는 구 여권층이다. 부안사태 직후 김 전 군수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거나 관망하다가 대세에 따라 반대진영에 협조했지만 이들 중 다수는 심정적으로나 김 전 군수의 40%대 지지에 보탬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찬성진영을 보겠다.
찬성진영의 논리는 지역개발 논리다.
골치 아픈 국가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명분과 그 보상자금을 끌여들여 건설경기 활성화를 앞세워 지역개발을 하겠다는 것이다. 가치보다는 이익추구 우선으로 취약한 부안경제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향수와 살기 힘든 농어촌 현실에 노출되어 있던 부안주민들에게 심정적 동의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을 수 있다. 김 전 군수 자신의 개발관이 투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공기관의 이론 받침을 배경으로 핵은 안전하다는 논리무장을 했다. 찬성진영의 핵심은 김 전 군수 자신과 선거 사조직이다. 지도부는 구여권 인사 일부로 사태직후엔 수세에 몰렸지만 점차 관의 지원아래 조직적인 동원과 공격적인 홍보에 나섰다. 그들은 순수한 애향심의 발로임을 강조하고 이길 이외에 대안이 있느냐고 항변하지만 그 진정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많든 적든 막대한 홍보예산의 수혜자가 있었음을 부인 못할 것이다.
찬성진영을 진단할 때 김 전 군수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찬성그룹의 통칭이 김 전 군수이기 때문이다. 혈구지도(絜矩之道)를 들어 말하고 싶다. 내 마음을 살펴서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는 대학의 말이다. 이는 맹자의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같은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나는 40대때 김 전 군수를 우연히 만났다. 안타깝게도 부안사태이후 사적으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 당시 그는 훤칠한 키, 잘생긴 외모에 활기찬 모습이었다. 여·야의 다른 입장이였지만 그에게 호감이 갔다. 훗날 그는 한번의 실패를 딛고 논·밭을 사탕과 박카스를 들고 군민들을 찾아다닌 결과 당시 여당의 아성을 딛고 기적처럼 무소속의 승리를 일궈냈다. 혼신을 다한 그의 열성에 주민들이 감동했고 심지어 진보적인 농민회원들조차 그를 지지했을 정도였다. 그때 나도 그에게 희망을 걸었었다. 그는 자신감이 넘쳤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창의성을 발휘하며 활발하게 군정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군정 1년여만에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치명적인 정책 결정 실수를 하고 말았다. 나는 부안군의 비약적인 발전을 꾀해보겠다는 그의 진정성을 믿고 싶다. 대통령의 격려전화까지 받았던 그에게 중앙정부의 배신은 뼈아팠을 것이다. 그를 사랑하고 지지했던 군민들에게 얻어 맞아 코뼈까지 부러지고 군민들의 외면과 비난에 괴로웠을 것이다. 그의 아내가 시장에서 수모당하는 것을 멀리서 본적이 있다.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같은 정치인 입장에서 내 아내를 생각할 때 가족을 이렇게까지 하면서 정치를 해야하나하는 회의도 들었다. 그가 격포 앞바다에서 고향 위도를 보고 통곡했다는 신동아의 기고글을 보고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핵폐기장을 유치 안했더라면 나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을텐데라는 개인적인 서운함도 있었다.
그가 진정성을 갖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고 여러번 강변해도 그는 여전히 반대진영의 공공의 적일 수 밖에 없다. 그는 선거때마다 출마한다. 40%대를 웃도는 높은 지지율도 보인다. 그렇다고 반대진영의 바람대로 더 이상 부안을 분열시키지 말고 출마하지 말라는 것도 메아리 없는 주장일 뿐이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정치를 그만두라는 말은 비유가 맞을진 몰라도 병원이나 약국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그만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것이다. 그는 명예회복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 같다. 조금만 지지율을 올리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매번 출마하는 것이다.
나는 그가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기독교인이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꽉 막힌 사람이 아님을 믿고 싶다. 그러기에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반대진영의 연속적인 승리에도 그와 찬성진영의 승복할 수 없는 허탄함은 여전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설사 승리한다고 하더래도 반대진영의 끈질긴 비난과 반대 투쟁속에서 군정을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진정한 군수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언제까지 소모적인, 비생산적인 집단 편가르기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찬·반 모두가 승복할 수 있고 김 전 군수의 명예회복도 꾀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는가.
말하자면 웬만하면 같이 살자는 것이다. 이제 그만 옴박지까지 깨지 말고


부안사회는 자기성찰을 해야 할 때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다(마태복음 7장 12절)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논어)

앞서 말했지만 우리 모두는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임을 고백해야 한다. 명분과 이념에 앞서 양진영의 입장을 내려놓고 우리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나 자신 지식과 앎이 짧아서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할 수 밖에 없다. 다소 길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의 말이다.
정신분석에서 어떤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있는 상황을 그대로 보는 일이다. 있는 그대로 보면서 근본적인 문제인식을 가지고 뭔가를 할 때 진짜로 행복해진다. 그냥 덮어두고 자기 합리화의 수단으로 행복을 얘기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뿐이다. 지금 사회가 그런 상태로 그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명지대교수 권인숙의 말이다.
그는 부천성고문 사건의 피해자이자 민주화의 상징이다.
성찰적인 사람이라고 해서 이기심과 복잡한 자기욕구를 극복한 도인같은 이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는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여러 각도에서 분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주로 해당된다. 그런데 단순히 생각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남에 대한 관대함을 키울 때 성찰적이다고 말하고 싶다. 성찰성을 갖추었을 때 옳고 그름, 잘한일, 못한일, 절대선, 절대악의 이분접적 규정이 훨씬 덜해지고 피해의식과 방어의식, 심한 우월감과 열등감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다. 대안을 찾을 수 있는 힘은 성찰성에서 온다고 믿는다.
부안사회는 상처가 많았을 권인숙의 말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할 일이다.
이어 미로슬라브 볼프의 ‘배제와 포옹’의 글 중에서 인용한다.
이웃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관점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가 필요하다. 나의 판단하는 것을 멈추고 타자를 적극 수용하는 것이다.
둘째로 내안에 타자를 수용할만한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로 타자와 소통을 시도하고 보완하고 수정해나가야 한다. 마지막으로 위 세가지를 반복해야 ‘공통의 언어’를 만들 수 있다.
화엄경을 번역한 법정스님은 화엄경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이웃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루어야 인간다움 삶을 잘 이룰 수 있느냐이다. 성경의 신약전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다.
자기성찰을 할려면 성철스님의 돈오돈수가 그 방법이어야 한다. 단번에 깨달아 이를 배워가며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다.
찬·반 양진영 모두가 같은 부안땅에서 유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중생이자 이웃이자 형제임을 인식할 때 우리 서로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이고 우리 삶의 근본이다.

절망의 굿판을 걷어치워야 부안이 산다
반대진영은 세 번의 선거에서 찬성진영의 지지율이 40%대를 웃도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아무리 정의와 명분, 정당성을 내세워 그들을 비난한다 할지라도 콘크리트 같은 40%대 군민의 실체를 인정해야 대화와 소통이 열릴 수 있다. 그리고 타협의 길이 열린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의외의 놀라운 말을 했다. 단재 선생은 올곧고 타협이 없는 고집스런 독립운동가로 알려진 민족사학자이기도 하다.
그는 “도덕과 주의가 이해에서 났느냐, 시비에서 났느냐”라고 묻고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고 개탄했다.
전북대 강준만 교수는 단정적으로 말한다.
사람들이 편 가르기를 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이익의 싸움인데도 명분싸움으로 위장을 하면 소통이 더욱 어려워진다. 이익의 세계에서 타협은 미덕이지만 명분의 세계에서 타협은 악덕이기 때문이다. 타협이 음지의 것으로 전락한 사회에서 무슨 소통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익과 명분의 경계가 명확한 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명분에서 이긴다는 건 권력을 갖는 건 물론이고 그렇지 못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소득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이익과 명분이 손에 손을 잡고 같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명분을 강하게 내세울 때 같이 따라가는 그런 이익측면이 무시되거나 무의식의 영역으로 숨기 쉽다.
설사 순수한 명분 일변도의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 내부에선 이익을 쟁취하기 위한 이전투구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물론 그러한 이전투구에도 명분이 무기로 사용되지만 이미 그때엔 그 내부 사람들조차 그것이 처절한 ‘밥그릇 싸움’임을 인정할 정도다. 즉 명분이라는 큰 포장마차안에선 이익투쟁이다 하더라도 문제될 게 없다고 보는 반면, 명분이 다른 집단은 전면 배척하고 독식을 하는 것이 선이요, 정의라는 편의주의가 작동하는 것이다.
부안사회에 너무나 정확히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이정도 했으면 찬·반 양진영의 지각있는 사람들은 알아들었을 것이다.
부안사태의 결과는 우리 모두가 패배자로 남았다는 것이다. 서로를 향해 창 끝을 들이대는 자해행위만 반복한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난하고 싸워오면서 닮아 왔다고 볼 수 있다. 찬·반 양진영의 패거리 싸움에서 군민들은 피로해질대로 피로해졌고 관심도 멀어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방치해두고 아무리 진정성 있는 부안미래방안을 토론하고 대안활동을 한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러면 너는 뭐냐. 똥 묻은 개, 재 묻은 개를 나무랄 수 있는냐
혹자는 내게 그러면 너는 뭐냐라고 물을 수 있다. 네 입장과 방안을 밝히라는 얘기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똥 묻은 사람이다. 그 똥을 털어내고 싶다. 그러기에 그 방법을 알고 싶은 것이다. 나는 정치인으로서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를 해온 사람임을 먼저 고백한다. 제일 잘할 수 있는게 정치라고. 깐에는 많이 공부하고 연구해왔다고 자부하는 아직도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여러번 낙선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세칭 정치중독자이다. 결코 겸손투의 말이 아니다. 현재 룸펜 상태로 할 일도 없다. 배운게 도둑질이더라고 할 수 있는 일이 정치밖에 없다.
언제가 가까운 대학후배가 내게 정치대신 시민운동을 권유한 적이 있다.
그는 조금은 내 진정성을 이해하며 내 노력을 안타깝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민운동 20년에 할 수 있는 일을 정치는 1년에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을 보라. 그가 실행하고 있는 서울시정이 그의 30년 시민운동결과보다 훨씬 낫지 않는가.
한번더 내 자신을 얘기한다면 나는 존·S 밀의 자유론을 신봉하는 사람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한 어떤 이유로도 정치·경제·사회·문화는 물론 종교를 포함한 정신세계까지도 침해를 받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정치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직·간접적으로 이 믿음에 상처를 입었던 사람이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찬·반 양진영이 전의를 불태우며 끝도 없는 소모적인 편가르기 싸움을 할 것이 눈앞에 불을 보듯 뻔하다.
아무리 정의와 명분, 정당성이 있는 진영일지라도 나는 이 대결구도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상처를 주고 받기도 싫다. 내 형제와 이웃을 적으로 인식하면서 승패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절망의 굿판에 설 수 없다.
이미 잃을 것도 얻을 것도 없는 단지 늙어가는 정치인이지만 이런 구도에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아니 못하는 것이다. 이름 없이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얼마전 열정을 보탰던 독립신문대표를 다시 맡아줄 것을 제의 받았다. 나는 정중하게 사절했다. 독립신문이 반대진영의 대변지가 될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더 독한말을 하자면 독립신문이 이 절망의 굿판에서 한 진영의 홍보지를 자청한다면 차라리 발행을 중지하라고 말하고 싶다. 찬성진영의 신문도 마찬가지다.

부안사회, 통합의 길로 가야
이제 결론을 말해야 될 것 같다.
찬·반 양진영은 명분만을 앞세우지 말고 대화와 소통을 해야한다. 가치와 이익을 나누는 협상을 통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반대진영부터 적극적으로 김 전 군수의 의견과 이익을 들어줄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김 전 군수의 명예회복의 길을 열어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 길은 결코 명분을 버리거나 비겁한 것도 아니요. 결코 음지적인 일도 아니다. 그의 의견과 요구를 몇 개가 되더라도 전부 들어줄 자세를 갖추면 그도 틀림없이 이 대결상황에 대한 해결의 답을 줄 것이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양진영의 강경논리에 함몰되지 않는 중간지대로 사람들이 모여 중재를 한다면 예상치 못한 대안과 결과물이 나올수도 있을 것이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모두가 승복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를 만들어 통합의 길로 가야한다.
그러면 그동안 중앙정치권이 주도했던 무기력하고 진부한 부안자치에 종지부를 찍고 군민들이 주도하는 통합자치정부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할수만 있다면 나는 통합의 길로 갈 것이다. 나를 회색주의자, 기회주의자라고 비난하고 무슨 정치적 저의가 있는냥 사시눈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나는 주저치 않을 것이다.
반핵광장을 평화의 광장, 통합의 광장으로 명명하고 통합자치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면 우리 부안군민은 위대한 군민이 되고 잘사는 군민의 미션을 눈앞에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감동시킬 부안 백성들이 통합의 길에서 함께 손에 손을 잡고 춤추는 그날을 상상해보자. 가슴이 뛰지 않는가.
글을 맺으면서 지운 김철수 선생이 말년에 대수리 토담집에 써놓았던 ‘怒乎(서호)’라는 글자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다.
중용의 ‘忠’‘怒’(충서)’ 개념으로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남을 헤아린다는 말로 앞서 말한 대학의 혈구지도 개념이다. 그는 남과 북 모두에게 외면당하면서도 통일을 주창했던 부안이 낳은 위대한 민족적 사회주의자다.

후기 - 많이 에둘러 얘기했지만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겠다시퍼 미리 용서를 구한다. 졸문을 싣기로 결정한 독립신문 관계자들에게 무한한 신뢰와 감사를 드리고 싶다.

부안독립신문 전 대표이사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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