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13일 오후 4시 비가 늦여름의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서울 도봉산 입구에는 약 5백년 전의 사랑이 합장하는 뜻 깊은 일이 있었다. 이매창과 유희경의 숭고한 사랑을 기리는 두 개의 시비가 부안군과 도봉구의 양 자치단체장이 참가한 가운데 도봉산 자락에 나지막이 누어서 제막식을 가졌다.
홍만종(1643-1725)은 ‘소화시평’에서 “근래에 송도의 황진이와 부안의 계생은 그 사조가 문사들과 비교하여 견줄만하니 참으로 기이하다”고 하였다. 여기서 계생은 매창을 말한다. 매창은 지금까지 황진이와 더불어 우리나라 기생문학의 쌍벽을 이룬다는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황진이는 매창보다는 더 많은 조명을 받아 소설, 드라마, 영화, 가요로 다양한 콘텐츠로 발전되어 상대적으로는 매창이 홀대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매창은 촌음 유희경(1545-1636)과 사랑을 나누었으며 당대의 허균(1569-1618)과 교유한 것으로도 유명했고, 사후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녀의 무덤을 돌봤고 아전들이 돈을 모아 흩어진 그의 시를 모아 발간하였다. 무엇이 매창을 사랑하고 그녀에게 미치도록 하는 것일까? 매창의 대표 시인 ‘이화우’에서 나오는 임은 서울 도봉사람 유희경이다. 그러나 매창이 사랑했던 사람은 유희경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자료에서 등장한다.
매창이 죽은 후 공동묘지에 안치되자, 사람들은 그 주변을 ‘매창뜸’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부안을 비롯해 근처에 공연 온 사당패들은 반드시 매창의 무덤을 찾아가 제를 지낸 다음에야 비로소 공연을 시작했다고 한다.
우리가 지금도 매창을 말하는 것은 유희경과의 만남 덕분이다. 유희경의 문집 촌음집에는 매창에게 준 7편의 시가 수록되어있다. 조선 유교시대에 사대부가 기생에게 이렇게 많은 시를 주고 그것을 자신의 문집에 실은 유례는 없다. 그만큼 유희경은 매창을 사랑했다. 촌음집에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틋한 시가 여러 편 있는데, 이것 역시 매창에 대한 그리움이 아닐까한다.
매창은 기생이다. 매창이 기생이라는 질곡에서 벗어나 위대한 여류시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은 인간 매창이 지닌 자의식에서 비롯한다. 인간 본연의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매력을 매창은 맘껏 드러냈다. 우리는 매창을 유희경의 연인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매창의 매력과 아름다움에는 눈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유희경에게서 매창을 놓아주는 것이 매창의 진면목을 보는 시발점이다. 유희경은 매창이 사랑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었을 뿐이다.
유희경이 42세, 매창이 14세 때 만난 것으로 짐작된다. 유희경은 ‘계랑에게’라는 시를 매창 앞에서 지었고, ‘장난삼아 계랑에게 주며’는 더욱 더 사랑의 강도를 느끼게 한다. 우리는 유희경의 시를 통해서 당시의 만남을 유추해볼 수 있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깊은 사랑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의 깊이만큼 이별의 아픔도 컸을 것이다.
그 후, 많은 시간이 흘러 유희경은 전주에서 매창과 재회하게 된다. 유희경의 시 ‘다시 계랑을 만나’에서 유추해볼 수 있는데 열흘간 시를 주고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매창은 31세, 유희경은 59세로 추정된다.
1573년에 태어난 매창, 조선시대 여성 가운데 유일하게 부역이 주어졌던 기생의 운명은 숙명이었다. 매창이 당대에 서울 도봉의 선비인 유희경과의 사랑에 빠져 타고난 시문을 남겼다는 것은 우리의 자산이다. 매창이 원하는 세상은 기생을 넘어서 지고지순한 여인으로서 남고자 했으며 어쩌면 일반 백성들의 고달픈 생활을 대변했다. 당시 부안현의 아전들이 시집을 발간하고,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것은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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