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 꿈아 무정한 꿈아

인당수(印塘水)의 전설이 서린 임수도(臨水島) ②
 

임수도를 지나 위도의 관문 파장금(波長金)항을 향해 더딘 걸음을 재촉하는 카훼리호 2층 갑판 위엔 30대 후반의 남자가 한명 서 있었다. 키는 175㎝ 정도로 보이는데, 꽤 야윈 편이었다. 검는 뿔테 안경 너머의 작은 눈동자는 맑고 촉촉해 보이지만 취기가 잔뜩 오른 눈망울엔 슬픔과 고뇌가 가득 고여 있었다.
카훼리호가 서해훼리호 침몰 지점에 이르자 그는 반병쯤 남은 소주를 병째 들고 나발을 불었다. 그러더니 빈소주병을 바다에 내던지고는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2층 갑판을 에두른 철재 난간을 붙들고 선 그의 뒤태로 짐작해 보자면 아무래도 292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그 죽음의 바다로 뛰어 내릴 성 싶었다.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동안 깊은 시름에 잠겨 있던 그의 눈동자에서는 식도(食島) 너머 왕등도(旺嶝島) 뒤편으로 뉘엿뉘엿 지는 석양빛에 그을린 섬뜩한 광채가 번뜩였다.
“어머니!...아버지!...흐윽!....동해야!....”
칠산바다 한복판에서 숨어 우는 그의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동녘아!....은정아!...흐으윽!...”
비장한 그의 눈빛과는 달리 나지막한 톤으로 부모를 부르고 처자식의 이름을 나열하는 그의 입에서는 술기운에 범벅된 슬픔과 미련이 쏟아져 나왔다.
입을 앙다문 그는 다시 또 결의를 다지는 듯 했다. 중국 상선을 타고 가다 인당수에 뛰어 들었다던 심청이 처럼 그도 갑판의 철재 난간만 훌쩍 뛰어 넘으면 임수도의 천길 물길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는 결심을 굳힌 모양이었다. 한반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왕등낙조를 한동안 바라보던 그는 물위에 떠 있는 모든 것들을 언제든지 집어 삼킬 요량으로 하얀 게거품을 물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임수도의 사나운 삼각파도를 주시하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철재 난간 하단에 한쪽 다리를 올리고 다시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참인데, 등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수 집이 오냐?”
김대수는 뒤를 돌아보았다.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50대 아낙은 다름아닌 신궁자였다.
“아니 이모! 육지 갔다 오시요?”
“어 너그 이모부, 지세가 얼매 남지 않아서 지찬 좀 사러 부안엘 댕겨 오는디 넌 어쩐 일이냐?
오랜만에 집이 오는 것 같은디?”
“별일은 없고요.
지난 추석 때도 못 오고, 어머니 제삿날도 오지 못해서 어머니 산소에 술이나 한잔 올릴라고 왔네요.”
카훼리호 선채가 심하게 흔들리는 탓도 있었지만 술이 많이 취한 대수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잽싸게 달려든 궁자가 대수를 붙들어 바로 세웠다.
신궁자는 친이모는 아니지만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친동생처럼 여겨 대수는 그녀를 이모라고 불러왔다. 궁자도 대수를 친조카처럼 여겨왔다.
철재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선 대수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라이터를 연신 켜보지만 세찬 바닷바람에 담뱃불을 붙인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렵사리 담뱃불을 붙인 대수는 한 모금 깊게 빨아서 가쁘게 내뿜었다.
대수의 얼굴은 아직 앳되지만 세상의 모든 근심을 죄다 짊어진 양 축 처진 양쪽 어께는 무거워 보였고, 담배 연기에 뒤섞인 깊은 한숨엔 숨길 수 없는 살기(殺氣)가 진하게 묻어 있었다.
이 때문인지 궁자는 무슨 말을 해야 될지 몰라 망설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대수가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서 심적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궁자는 잠시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넉 오메 지세가 음력 팔월 스무 난날 아녀?
“예, 양력으론 내일 10월10일이 9주기 되는 날입니다만
제사는 매년 음력 팔월 스무 나흗날 모시고 있는데
지난 주 월요일이 기일이었네요.”
“이모라는 사람이 먹고 살기가 바쁘다고 너그 집이 어떡기
돌아가는지 신경을 못써 입이 열 개라도 헐말이 없다만 넉 오메 지세는 너그 성 만수가 계속 지내지야?”
“예, 형님이 큰 아들이라 어머니 제사도 아버지 제사도 모시고 있습니다만...”
말끝에 한숨을 잔뜩 찍어 바른 대수의 대답을 듣고, 궁자는 더 이상의 질문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대수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식도 뒤편의 거북바위 쪽을 바라보았다.
“동핸가 고놈이 살았으면 시방 열 두세 살은 안됐겄냐?”
불쑥 내뱉은 궁자의 질문에 만수는 대답을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수의 눈엔 순식간에 핏발이 돋아났고, 금새 가득 고인 크렁크렁한 눈물이 관자놀이 아래로 주르르 흘러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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