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부안의 평화 원한다면 자중하기를 독제권력의 수족이란 오명벗기 위해서도

대한민국은 민주 국가이다?
이 당연한 명제에 의문부호를 붙이게 하는 일이 부안에서는 계속 벌어지고 있다. 절대 다수의 군민만이 아니라 세 살배기 어린아이까지도 그 이름조차 싫어하는 자가 여전히 권좌에 앉아 하루하루 백성의 피를 빨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공의 이익에 봉사해야 할 공무원과 경찰은 독재자의 신변을 지키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병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길을 가는 행인이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고, 성스러운 교회에서조차 폭력이 저질러지고 있지만 독재자의 편에 선 자들이라는 이유로 법의 관용이 베풀어진다. 사전선거용 치적 홍보 행사는 ‘공무’라는 이름 아래 법과 공권력의 보호를 받고 있다. 반면,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민주(民主)’를 지켜내기 위한 민초들의 몸부림에는 여지없이 온갖 죄목의 족쇄가 채워진다.

또 한 사람의 군민이 옥에 갇혔다. 독재자를 향해 밀가루를 던졌다는 이유다. 오직 부안이 좋아 부안에서 뿌리박고 살아 보려는 젊은 농사꾼인 그에게는 아직 첫 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아이가 있다. “돌아오는 농촌, 살 맛 나는 부안을 만들겠다”며 입에 거품을 물고 헛된 약속만을 외치던 독재의 수장과 그를 비호하며 자신들의 밥줄 잇기에만 급급한 경찰의 눈에 이런 젊은이들은 분명 관용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격포항에서 요트대회가 치러지던 날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개막행사를 지켜보던 나는 경찰로 보이는 몇몇 괴한(?)들에 의해 강제로 끌려 나와야 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김종규 씨가 축사를 위해 연단에 오를 시간이 되었고, 노란 옷을 입은 내가 그 주위에 서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 괴한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끌어낼만한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나의 항의에도 막무가내였으며, 주변에 있던 검은 제복의 경찰들은 그 분명한 폭행사태를 방관하거나 오히려 적극 돕고 있었다. 이날 많은 군민들은 독재자의 편안한 점심식사를 위해 이동의 자유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이튿날 예술회관 앞에서 나는 또다시 경찰의 폭력과 반인권 행위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이 XX 또 왔네, 연행해”라고 서슴없이 욕질하는 양복차림의 그는 간부급 경찰임이 분명했다.

부안항쟁 과정에서 경찰의 반인권 행태는 늘상 겪었던 터인지라 사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내가 더욱 분노하는 이유는 이처럼 피해 당사자인 내가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으며 출두 조사까지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는 점 때문이다.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요즘 상황이고 보면, 부안이 다시금 악몽 같은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하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한 재판관을 상상한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약 당신 아들이 당신의 뜻에 반대하여 집에 불을 지르고 대항하려 든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아이를 끌어안고 울겠습니다. 아! 네 가슴 깊이 들어앉은 고통이 그렇게도 컸구나! 하며,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답이다.

법은 약자에게 관용을, 강자에겐 더욱 예리한 심판의 칼날을 들이댈 때 누구라도 받아들일만한 중용의 미덕을 발휘할 수 있을 터이다. 또한 그럴 때 만인이 나서 스스로 법질서를 지켜 나가려는 마음을 맞게 될 것이다. 굳이 방패와 곤봉으로 에워싸고 찍어 누르는 억지를 부리지 않아도 말이다. 그러나 지금, 부안은 법의 중용은 커녕 최소한의 형평조차 지켜지지 않고 있다.

경찰에 묻는다. 경찰은 ‘부안사태’의 근본 책임이 인권을 무시한 공권력의 과잉진압 행위에 있었다는 국가인권위의 판결도, 부안민중은 밟을수록 거세게 일어선다는 부안항쟁의 교훈도 그새 잊었는가?

부안 경찰에게 진심으로 당부한다. 부안에 평화와 질서가 뿌리내리기를 원한다면 부디 자중하기를…. 스스로 독재 권력의 수족이 되어 자기 밥그릇이나 지켜 가려 한다는 오명을 벗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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