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물 한 방울이 꽃을 피우게 한다는 말이 있다. 나에게도 이러한 기억이 있다. 며칠 전 필자는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배 선생 인생이 좀 금이 간들 어떤가, 내가 틈이 좀 생겨야 그 틈으로 사람도 들어오고 나가지 않겠는가, 그래서 산다는 것은 어쩌면 틈을 내어주는 일이지 싶네.”라는 글이었다. 편지를 읽노라니 어릴 적 공동시암과 우리 집 물항아리를 오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경험하고 죽을 밥 먹듯 했으니 지금도 내가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가 죽이다. 요즘은 바지락 죽, 백합죽 등 다양한 메뉴를 개발하여 현대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지만 그 시절이야 어디 죽이 미식으로써 음식이었겠는가. 양을 늘여 온 식구가 먹어야 했으니, 보리죽도 감사한 음식이었다.
부모님이 품팔이 나가면 물을 길어 항아리를 채우는 일과 나무 하는 일, 밥 짓는 일은 내가 도맡아 했다. 나무 하는 일은 계절에 따라 산딸기 머루를 따먹는 맛과 산새소리 바람소리 듣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다. 제일 힘든 일은 매일 물항아리를 채워놓아야 하는 일이었다. 수대를 이용해 물을 길어 나를 때는 먼 길을 두세 번이나 더 다녀야 했으므로 가끔 어른용 물지게를 짊어지기도 했는데, 당시 물지게는 대단한 문명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내가 어른용 물지게를 땅에 질질 끄는 것이 보기 싫었는지, 물 긷는 생산성을 높이려 하였는지 내 손을 잡고 나섰다. 지금의 부안초등학교 후문쯤에 있는 함석집으로 데려가 양철 물통을 내 몸에 딱 맞게 맞추어 주었다. 나는 매일 학교가 파하면 그 물지게를 짊어지고 우물과 우리 집을 오갔다. 그렇게 내 유년은 여물어 갔다.
어쩌다 우물에 늦게 가거나 가물기라도 하는 날에는 까치발 끝에 힘을 모으고 두룸박을 우물바닥에 뉘어 한 종지라도 더 길어 올려야 했다. 그나마 애써 길어 올린 물은 함석물통에 생긴 틈으로 흘러나와 애태우게 했다. 납땜으로 때워도 물의 무게 때문에 다시 틈이 생겨 물지게 넓이만큼의 동구길 가상 자리를 촉촉이 적시곤 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그래서 그런지 물이 새지 않는 쪽보다 물이 새어나간 쪽의 풀이며 야생화가 더 푸르고 고왔었다.
그렇다,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완벽을 추구한다. 나도 그렇다. 자신의 금간 모습을 감추려 틈을 막는 것도 모자라 자신을 한 겹 더 포장하려 한다. 또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허물은 자랑할 일은 아니어도 수치스러운 일은 아니다. 허물은 삶의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은 금간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사람들 때문에 삭막해지는 것이다. 좁은 마을길에 뿌려진 물통의 틈처럼 내가 다소 부족하고 틈이 생겼을 때 마음이 오가고 주변이 여유로워지는 것 아닐까. 생은 이처럼 틈을 내어주고 그 틈으로 흐르는 삶을 관조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틈은 꽉 막혀 밀폐된 공간에 생기는 파문이다. 그 파문은 무한히 확장되어 대상과 상생을 접면할 수 있는 에너지다. 틈을 통해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한 방울의 물이 꽃을 피우듯 조금 부족한 것이 상생을 있게 하는 것이다.
작금의 부안은 현안들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양철동이의 틈처럼 마음의 틈을 내어주었으면 한다. 고여 있고 뭉쳐 있는 의식에 틈을 내자. 틈은 소통이며 생의 근원을 세우는 일이다. 틈은 안과 밖, 나와 너, 나아가 존재론적 관계를 통합하는 길항의 관계이며 상생의 꽃이다.
아버지가 내 어깨에 걸쳐 준 물지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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